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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Mar 05. 2022

지금 이 순간 나 살아 있다는 것

인대 파열 전치 6주의 기록

*제목은 뮤지컬 명동로망스 넘버 '집시처럼' 가사를 인용하였습니다.


D-Day

첫 학기의 첫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자축의 시간을 보내던 저녁이었다. 집주인 분들도 외출을 하셔서 (나중에 알고 보니 여행이었지만) 집에는 나 혼자였다. 화장실을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딱 두 발짝 걸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철퍼덕 넘어졌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조심조심 걸었다. 다음날 만나기로 한 친구 M에게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했다.


D+1

간밤의 얼음찜질은 별 효과가 없었는지 발목이 퉁퉁 부었다. 전혀 걸을 수가 없어서 엄마한테 연락을 했다. '오메 얼른 병원 가봐라'라는 답을 받았다. 도움을 구할 데가 없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차로 30분 거리의 다른 도시에 사시는 친구 M의 엄마께 연락을 드렸다. 주말 아침인데도 무척 걱정하시면서 응급실로 가자며 바로 준비해서 와 주셨다.


아주머니이 동네 대학 병원 응급실에 갔다. 한 발로 콩콩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왼쪽 마저 다치면 끝장이다란 생각으로 정신 바짝 잡고 움직였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휠체어를 탔다. 독일 병원 휠체어는 다르게 생겼다. 응급실은 생각보다 한산했지만 뭐든 기다려야 했다. 간호사 선생님을 기다리고,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고, 방사선실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엑스레이는 발명한 사람 이름을 따서 뢴트겐Röntgen이라고 부르고, 깁스는 깁스Gips다. 독일어 단어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을 일이 있을 줄은, 아니 실제로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약국에 가서 60유로를 웃도는 주사와 약을 구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당장 먹을 식료품들을 샀다. 정확히는 아주머니가 모두 사다 주셨다. 이 동네가 익숙지 않은 아주머니께서 시내에서 길을 잘못 들어 일방통행길 역주행 + 도보 전용 도로 진입을 하던 차에, 마침 맞은편에서 오던 경찰차에 딱 걸렸다. 나 때문에 급하게 나오셨던 거라 면허증도 두고 나오시는 바람에 벌금 20유로를 냈다. 200유로는 낼 줄 알았는데 20유로 밖에 내지 않았다며 아주머니는 너무 친절한 경찰이라고 하셨다. 친절한 경찰 선생님은 나한테도 얼른 나으라고Gute Besserung 해 주셨다.


D+2

집주인 분들이 돌아오셨다. 아주머니는 깁스를 한 나를 보자마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몹시 걱정스러워하셨다. 나는 어설프게 목발을 짚으며 멋쩍게 웃었는데, 아주머니는 내 짧은 독일어 설명을 듣는 내내 팔자가 된 눈썹을 풀지 못하셨다. 그러게... 내가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D+5

헬로프레쉬라는 밀키트 비슷한, 구독 서비스를 주문했다. 쌀은 있는데 반찬을 준비하기가 힘들었고, 장을 보러 가지 못하니까 재료를 배송받으면 뭐라도 해 먹을 수 있겠지 싶었다. 2인분 씩 3가지 요리의 재료를 할인가 18유로에 구입했다. 정가는 45유로쯤 했던 것 같다.


D+6

친구 R이 집에 찾아왔다. 드럭스토어에서 사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물론이고 한국 과자도 잔뜩 가져왔다. 친구와 함께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집주인 아주머니가 다시 요리를 하는구나! :) 하셨다.


D+7

고민 끝에 친구한테 장을 봐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내 열쇠를 넘겨주면서 자전거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마트 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친구는 마트에 도착했다며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 보내왔고, 맛있어 보이는 건 죄다 사 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은 친구가 해 줬다.


D+8

아침부터 R을 배웅했다. 곧 다시 만나길 바라며. 혼자 땅굴 파고 들어가기 전에 친구가 와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옛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D+12

아침부터 헬로프레쉬 배송이 왔다. 불고기 어쩌구 하는 메뉴를 해 먹었다. 고수랑 라임이 들어가는 게 심상치 않더라니 완성된 요리는 딱 분보남보 맛이었다. 그래도 집주인 분들은 맛있다는 평을 남겨 주셨다. 많이 드시지는 않으셨지만.


D+13

병원 예약을 도와주셨던 친구 어머니가 요즘은 좀 어떤지, 병원은 어떻게 가냐며 연락을 해 오셨다. 상태는 괜찮아졌는데 병원을 어떻게 갈지는 모르겠다고 했더니 내일 오전에 나를 픽업해서 병원에 동행해 주신다고 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D+14

아주머니와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생각보다 빨리 깁스에서 해방되었다. 초음파로 이리저리 발목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은 다 좋아지고 있다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께 전달드린 건 응급의 선생님이 써 주신 소견서와 그날 찍은 엑스레이뿐인데 '좋아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좋다고 하니 안심이 되긴 했다. 다음 예약은 한 달 뒤로 잡아 줬다.


보조기 비용으로 100유로 가까이 지출했다. 보험사는 나에게 얼마나 돌려줄 수 있을까? 아직 받지 못한 응급실 청구서가 새삼 또 두렵게 느껴졌다. 걷지 못했던 기간 동안 종아리 근육이 다 빠져버린 탓에 다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라고 했지만 발을 딛는 것 이상은 무리였다. 깁스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통장 잔고도 걷는 것도 그냥 다 무서워졌다.


D+16

목발 없이 내 방에서 세탁기가 있는 방까지 걸어갔다. 집 안에서라도 움직일 수 있으니 훨씬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딱 그만큼이었다. 남은 게 한 줌뿐인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당겨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 다시 목발을 짚었다.


D+19

잠깐 밖에서 전달받을 게 있어서 목발을 짚고 나가 보기로 했다. 다행히 비는 그쳐서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신발을 신을 수 없으니 크록스를 신고 나섰다. 20분 남짓 걸어서 만나 물건을 전달받고 집에 또 20분 걸려서 걸어왔다. 고작 40분의 시간이 2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해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뻗었다.


D+24

너무 갑갑한 마음에 옆 동네 친구 R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기차역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목발 하나만 짚고서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목발이 없어도 걸을 수 있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정말 오랜만에 식당에서 밥 먹고 바깥바람도 잔뜩 쐬니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D+29

집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슈퍼에 가기로 했다. 목발 없이 나가는 첫 외출이었다. 쇼핑카트를 끌고 넓은 슈퍼를 돌아다니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슈퍼가 그렇게 넓은지, 전에는 몰랐다. 집에 돌아오니 오른쪽 발목에서부터 피로감이 크게 밀려왔다.


D+33

의자 없이도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보조기 없이도 오른 발로만 버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전거를 타 보려고 했는데, 요 며칠 폭풍이 데려온 강풍 탓에 자전거 보관소 지붕에 나무가 꺾여 쓰러져 있었다. 자전거를 꺼낼 수 없어 포기하고 오늘도 차를 얻어 타고 장을 보러 다녀왔다. 여전히 오른쪽 스니커즈는 꺾어 신어야 했지만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D+34

친구 M이 집에 놀러 왔다. 약속을 잡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준비했다. 이제는 많이 괜찮아 보인다며 다행이라고 했다. 친구 어머니께서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다고, 친구에게도 고맙다고 전했다.


D+36

국외 부재자 선거를 위해 근처 대도시로 가야 했다. 고민 끝에 걸어서 기차역까지 갔다. 30분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산책 자체가 오랜만이라 행복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D+37

발 부기가 제법 빠졌는지 보조기를 착용하고도 신발이 들어갔다. 이제서야 오른쪽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신발을 신을 수 있으니 자전거도 탈 수 있었다. 갑자기 멈추면서 발을 딛는 일이 생기면 다칠 것 같아서 평소보다도 천천히 달렸다. 그동안 제법 붙은 근육들이 열일하는 게 느껴졌다.


D+41

한 달만에 다시 정형외과를 왔다. 통증이 더 이상 없다고 했더니 아주 좋은 경과라고 했다. 초음파로 복숭아뼈 아래를 보시더니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아직 혹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하셨다. 2주 안에 혹시 통증이 느껴지면 다시 찾아와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병원은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치고 아픈 몸을 통해 오히려 살아 있다 느끼는 게 어쩌면 참 위험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게 아닌 데다가, 주사를 통해 나는 나를 아프게 하는 데에 늘 서툴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갑작스레 닥친 어려운 시간을 감사의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제발 건강하자. 더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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