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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Apr 08. 2022

궁상? 아니 사랑


 비가 내리는 겨울날이면 엄마는 밖으로 나가서 못 노는 고만고만한 사 남매에게 가을에 수확해 얼지 말라고 안방 윗목에 놓았던 고구마를 쪄서 간식으로 줬다. 앞마당에 묻어 두었던 장독에서 꺼낸 슬러시처럼 살짝 언 동치미 국물도 함께 쟁반에 놓였다. 비 가 내리던 그날도 달짝지근한 고구마를 쪄주셨다. 우리가 모여 먹고 있는 동안 엄마는 다락에 두었던 손잡이까지 쇠로 되어있는 커다란 가위와 바늘, 무명실을 꺼냈다. 방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긴치마를 잘 펼쳐놓고 가위로 아랫단의 나풀거리는 프릴을 가지치기하는 듯 거침없이 잘랐다. 고구마 먹는 걸 멈추고 가위의 움직임을 따라 사 남매의 토끼처럼 놀란 눈동자도 바쁘게 움직였다. 치마는 금세 통이 큰 바지 모양으로 잘렸다. 무명실을 꿴 바늘로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두 번 긁은 다음 다리 두 개가 들어가게 꽤 메었다. 그리고는 허리와 발목에 검정 고무줄을 넣어 시골 아주머니들의 교복인 몸뻬를 완성했다. 요즘은 왜 바지, 일 바지로 불리지만 그때는 몸뻬라도 했었다.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부재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눈만 뜨면 밭과 논으로 일하러 다녀야 했다. 아마도 프릴이 있는 긴치마는 마늘종을 뽑아 담는 허리에 둘러매는 보자기만큼도 쓰임이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지금 생각하면 옷 리폼을 한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큰아이가 태어나 2돌쯤 되던 어느 날 옷장 정리를 하는데, 결혼 전에 입었던 작아서 더는 못 입게 된 면 블라우스가 보였다. 나도 엄마의 리폼 DNA를 물려받았는지 재활용 쓰레기에 버리려다가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아이가 자는 틈을 타서 나는 가위와 가정용 재봉틀을 꺼냈다. 지난 달력을 뜯어 옷 본 비슷하게 만들었다. 블라우스에 대고 연필로 옷 본 대로 그린 다음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했다. 재봉틀을 사놓고 2년 넘게 사용하지 않아서 재봉틀 사용법을 기억해 내면서 바느질을 이어갔다. 3시간의 긴 시간 만에 블라우스는 민소매 아이 옷으로 만들어졌다. 제법 그럴싸한 모양에 자는 아이의 몸에 대보았다. 얼마나 예쁠까? 혼자 설레면서 아이가 깨기만 기다렸다. 얼마 후 아이가 깨자마자 옷을 입히려는데 아기들의 머리는 몸통과 비슷하게 크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나의 첫 리폼은 재봉틀 사용법만 확인한 채 끝나버렸다.


하지만 리폼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의 바지가 너무 길면 몸뻬처럼 아랫단에 고무줄을 넣어 발목에 맞게 만든 다음 안으로 접어 넣어서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길이가 짧아진 바지는 무릎 위로 잘라 서툴지만, 재봉질로 밑단 처리를 해서 반바지로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저렴하고 예쁜 옷이 넘쳐나는 때 궁상을 떠는 거 같이 느껴지지만 나는 리폼을 하는 동안 이 옷을 입을 아이만 오롯이 생각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아이의 다리 길이를 재보면서 통통한 다리로 뛰어다닐 때 바짓단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서 좋았다. 고무줄이 필요 없어질 정도가 되면 어느새 자란 아이의 키가 흐뭇했다. 엄마처럼 수려한 솜씨가 있어 근사하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 생각하는 마음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생각한다.




나는 해마다 신생아 살리기 모자 뜨기 키트를 사서 캠페인에 참여해 오고 있다. 신생아 살리기 모자 뜨기는 진료환경이 열악한 나라의 신생아에게 모자를 씌워주므로 인해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을 막아 생명을 살리는 캠페인이다. 어른 손만 한 모자를 뜨면서 이 자그마한 게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만든다고 생각하 정성으로  한 코 한 코 이어갈 수가 없다.  엄마의 일바지 만들던 날의 기억이 내가 수선해 입히던 아이들의 옷과 신생아 살리기 모자 뜨기까지 이어지게 한 끈이 아닌가 싶다.


나의 리폼은 아마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게 설령 안 예쁘고 잘못 만들어지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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