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에서 제독까지 된 인물
오늘은 해적에서 해군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와 하이예르딘 바르바로사Barbaros Hayreddin 두 인물을 비교 분석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해상에서 타인의 재산, 생명을 강탈했던 여느 해적들과는 다르게, 국익을 위해서 적국의 선박과 물품을 탈취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으로 평가한다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학자들은 ‘해적’과 같은 일반적인 개념의 용어로 설명하지 않고 사략선업자privateering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하며, 이슬람권의 지중해권역에서 활동한 사략선 그룹을 Corsair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성장과정
일단 성장환경을 살펴보면 두 인물 모두 비주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1540년 영국 데번 주 타비스톡Tavistock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두자녀 중 장남으로서 카톨릭교도가 주류인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교 가족으로 태어난 드레이크의 집안은 비주류로서 차별을 받았고, 이런 환경은 유년시절 드레이크로 하여금 바다로 나가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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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예르딘 바르바로사는 1478년 오스만제국령 레스보스에서 오토만 제국의 변경 지역에서 그리스계 알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드레이크가 사촌의 영향을 받았다면, 하이예르딘은 일찍이 바다로 진출했던 형제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하이예르딘의 형제(야쿱Yakup, Oruc오루치, 일리아스Ilyas)들은 지중해 권역에서 무역업에 종사를 했으며, 형제들을 따라서 하이예르딘도 자연스레 뱃사람의 길을 걸었습니다.
*해적으로 성장
드레이크는 어릴 때부터 바다로 나가 해안 지역 및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는 상선에서 일했으며 노예 무역상이었던 그의 사촌 존 호킨스 경(Sir John Hawkins) 밑에서 뱃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닷길을 통해서 물자를 옮기는 상인과 그것을 강탈하는 “해적”을 구분 짔는것은 매우 애매했습니다.
잘 다루어지지 않지만 16세기 후반 당시 영국의 독특한 사회-경제구조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운업과 더불어서 사략해적산업은 하층민과 상층부 엘리트 귀족-왕족들 사이 중간에 껴있는 애매한 소지주 혹은 젠트리 계급들이 돈을 투자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사업에 가까웠습니다.
신항로가 개척되고 신대륙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지만 자기가 직접 험한 바닷길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지주들과 젠트리들은 물자와 돈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지분을 얻기를 원했고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이른바 사략해적 그룹들은 이윤을 얻기를 원하는 나으리들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가 되었으며 드레이크와 호킨스도 영국의 이런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사력해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해적사를 연구한 피터레이 교수는 또한 드레이크의 해적활동에 종교적인 요인도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종교개혁이후 구교도(카톨릭)과 신교도(프로테스탄트)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는데, 해양공간에서도 "우리"와 "그들"같은 종교적 이분법은 해적들의 세계관을 지배했습니다. 특히나, 카톨릭의 맹주였던 스페인 입장에서 "이혼"을 위해 교회법까지 바꾼 영국은 매우 불편한 존재였고, 영국 입장에서도 스페인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내정간섭을 하려고 하는 악의 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영국해적 입장에서 스페인 상선의 물자와 선박을 나포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가 아닌 종교적으로 매우 정당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해적들은 스페인 선원들을 가리켜 Papist(교황성애자)라는 저속한 말을 한 것만 봐도 해양공간에서 두 국가의 종교적 대립관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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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집단이 행하는 해적질의 경우도 “종교적인” 색체가 매우 강했습니다.
당시 지중해는 팽창하는 오스만제국과 그를 견제하려는 기독교 세력의 충돌지점으로서, 두 세력간의 충돌이 잦은 공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로도스에 근거지를 둔 구호기사단이 “종교”적인 명분으로 이슬람 상선을 약탈하거나 습격하는 일이 빈번했고, 바르바로사 형제들의 상선도 이들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바르바로사 형제는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들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세력이 되고 이때부터 해적의 길을 걷게 됩니다.
즉, 지중해 권역에서 기독교 vs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대결구도 속에서 바르바로사 형제의 해적질은 오스만제국이라는 무슬림제국의 국익을 위해서 기독교 해적단(몰타, 구호기사단)에 맞서는 종교적 이념적 정당성이 더해졌습니다.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해적질은 단순히 기독교 선박의 물자와 노예를 강탈해서 현생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뿐 아니라, 알라의 이름을 드높여 사후세계에서도 천국에 가기위한 “신성한”행위였습니다. .
기독교 세력과 충돌이 잦은 지중해에서 바르바로사 형제의 명성이 높아진 계기는 1492년 레콩키스타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무슬림들을 선박으로 이송하는 작전을 도맡은 일화이며, 이는 1504년부터 1510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기독교도들에게 탄압받던 무슬림 집단들을 바르바로사 형제는 자신의 선박을 통해서 북아프리카 지역에 이송시켰고, 스페인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찬 이들은 바르바로사 해적단의 일원이 되고 이후 오늘날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지역은 바르바리 해적단의 근거지에 자리잡아 지중해에서 바르바리 해적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구호작전을 기점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바르바로사(붉은수염)이라는 명칭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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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지중해에서의 활동무대의 차이
드레이크는 서인도 제도와 아프리카에 대한 호킨스의 초기 탐험에 여러 차례 참여했의며, 이러한 경험은 드레이크가 초창기 뱃사람이 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나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아프리카 서해안 원주민들을 생포하여 카리브해 섬과 스페인 식민지였던 중남미 식민지에 팔아넘기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이 과정에서 불법을 자행하는 드레이크는 스페인함선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고, 스페인 항구와 요새를 습격하면서 에스파냐 해군에 대한 특성을 파악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향후 그가 영국해군에 미치는 주요한 전략적 자산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드레이크 입장에서 스페인을 증오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1568년 항해 도중의 날씨 악화로 호킨스와 드레이크의 선단의 일부가 파손되어 현 멕시코의 베라 쿠르스 인근의 항구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역을 관리하는 에스파냐의 총독은 호킨스와 드레이크 선단의 노예 일부를 양도 받는 조건으로 정박을 허가하고 그들의 안전한 출항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약속을 어기고 호킨스와 드레이크 상선에 대 한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지휘 하는 선박만 간신히 살아남고 나머지 배들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내 부모를 죽인자는 용서해도 내 재산을 강탈한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드레이크가 에스파냐에 대한 복수심을 가슴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8년 사건 이후 드레이크는 무역 선단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에스파냐 선박들에 대한 습격과 강탈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항해술과 해상전투력 그리고 스페인에 대한 증오심까지 합쳐지면서 드레이크 해적단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스페인입장에서 얼마나 무서웠으면 드레이크Drake를 서구권에서 악마와 동급인 드래곤Dragon으로 부를 정도였으니깐요.)
드레이크의 명성은 당시 스페인과 해상패권을 놓고 갈등 중이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눈에 띄게되고, 영국왕실은 드레이크에게 에스파냐 선박의 공격을 허락하는 왕실의 허가장을 발행해 주게됩니다. 드레이크의 해적질은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게 되면서, 에스파냐 선박에 대한 약탈과 습격이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드레이크의 해적질은 더더욱 탄력을 받게됩니다.
드레이크는 1577년 120톤의 기함 골든 하인드호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태평양, 인도양을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 오는 역사적 항해에 나섰습니다. 태평양 연안의 북아메리카 항로개척 의 명분도 있었지만 드레이크 원정의 주된 목적은 남아메리카 태 평양 연안을 항해하는 에스파냐 선박의 약탈이었습니다.
1579년 3월 드레이크 해적단은 현 샌프란시스코 연안에서 현 시가로 1200만 파운드 에 달하는 80파운드의 금과 26톤의 은을 적재한 스페인의 카카푸에고호를 나포한 뒤 영국으로 금의환향 하기도 했습니다.
1588년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보 냈을 때 드레이크는 이제 국가의 고위관리로서 에스파냐에 대적 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부제독Vice-admiral으로서 에스파냐의 침공을 막아내는 역할을 부여 받았습니다.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도버에서 34킬로미터 거리의 칼레 연안까지 다다른 무적함대에 드레이크는 색다른 전술을 선보였습니다.
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에스파냐 함대에 화공선을 보내 대형을 흩뜨린 다음 가까운 거리에서 화포 사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칼레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선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지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두 척이 격침되고 세 척이 나포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무적함대의 손실은 엄청났습니다.
당시 세계최강의 무적함대를 꺽은 드레이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해적에서 영국사회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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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의 부상은 당시 오스만제국의 대외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술탄 술레이만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반란 그리고 남-동부유럽전선 상황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지중해 문제에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카를 5세는 1530년 몰타와 1535년 튀니스를 점령했고, 기독교 세력의 해군제독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군대는 모레아의 주요 항구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스만 해안을 약탈하고 침공했습니다.
그러자 술래이만은 1533년 당시 지중해에서 활약하고 있던 하이에르딘 바르바로사를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지중해 제해권 확보에 나서게 됩니다. 바르바로사는 알제리를 점령한 뒤에는 그곳 지역 사령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알제리를 병합해 지중해 함대의 병참 기지로 삼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격에 대비해 지상군도 파견했습니다. 1537년, 바르바로사는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습니다.
양국의 운명의 일전은 1538년 알바니아 프레베자(Preveza)에서 일어났습니다.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유럽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제해권을 확립했습니다. 이어 베네치아도 마지막 보루였던 모레아와 달마티아를 양도함으로써 동 지중해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우위가 확립되었습니다.
간헐적인 저항을 시도하던 카를 5세는 1541년 알제리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속되는 도전에 바르바로사는 1543년 합스부르크가 영토인 니스를 점령했으며, 당시 합스부르크와 경쟁했던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수립하는데도 바르바로사의 외교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르바로사의 활약덕분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툴롱을 오스만 해군 기지로 제공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서 지중해에서 오스만의 존재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향후 레판토해전에서 패배하기 까지 3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전술
여느 해적집단이 그렇듯, 드레이크 해적과 바르바리해적들은 해상과 바다에 인접한 연안지대 약탈과 습격을 위해 대체적으로 수륙양용Amphibious tactic 작전을 씁니다.
드레이크의 해적단과 바르바로사 해적단의 노획 목표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드레이크의 해적단이 신대륙에서 획득한 물자와 귀금속을 적재한 선박을 사냥하는 것이 주요 목표라면 바르바리해적단의 주요 목표는 “노예”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전사 연구자인 Ernle Bradford는 지형적인 요인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빈번하고 매우 강하게 부는 북해-대서양 등지에서 활동하는 드레이크 해적단의 경우 기동력과 효율성 측면에서 갈레온을 이용했고, 남쪽의 따뜻하고 더운 기후가 오래 지속되는 지중해에서는 북쪽 지역만큼의 해풍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해적단의 경우 노를 통해서 움직이는 갤리선이 유용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드레이크의 경우 대양항해에 적합한 갤리온을 이용했다면, 바르바로사 해적의 경우 북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둔 상태에서 지중해 연안의 마을 습격해서 노예탈취를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단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많은 인원을 적재하는 갤리선을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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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에서 다양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드레이크는 주로 "갈레온"으로 알려진 유형의 선박을 사용했습니다. 갈레온은 여러 개의 포 갑판을 갖춘 크고 중무장한 전함이었습니다. 드레이크의 유명한 일주 항해 중 기함은 "골든 하인드(Golden Hind)"였습니다.
대포사격에 중점을 둔 드레이크 해적의 전술과는 다르게, 갤리선을 이용한 바르바로사 해적단의 경우 적의 함선에 승선하기 이전 대포사격을 하고 적 함선에 충돌을 한 후 및 백병전을 하는 전략에 더욱 치중했습니다. .
갤리선은 노와 돛으로 추진되는 길고 가느다란 배로, 지중해의 좁은 바다에서 민첩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대포는 드레이크의 해적단이 스페인을 상대하는 전술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배에 접근을 해서 백병전을 시도하려는 스페인 함선에 비해서, 함선 사이 거리를 두고 포격을 가하는 드레이크 해적단의 전술에서 대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드레이크 해적단이 사용한 대포는 스페인 군에 비해서 그 성능과 휴대성이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특히나, 바퀴가 2개밖에 없던 스페인 아르마다 함선의 대포에 비해서 드레이크 해적단의 갈레온의 경우 4개의 바퀴가 장착이된 대포가 주를 이루었었는데, 이는 포 사격시 무게가 효율적으로 분산이 되 반동이 적어 적중률이 높은점, 그리고 배 위에서 포문과 포문사이 장소 이동이 용이해서 적함선에 비해 더 많은 사격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근대시기 해전에서는 이른바 배가 적군의 함선에 사격을 가하기 위해 배의 옆면을 보여주는 측면전술Broadside tactic이 널리 통용되었는데, 바퀴 4개가 장착된 대포로 무장한 드레이크의 함선은 함포사격의 횟수, 대포 배치 시 이동성의 유용성 측면에서 스페인 함선보다 더 유리한 우위를 점했습니다.
이상으로 해적에서 해군제독까지 오른 입지적인 두 인물 드레이크와 바르바로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두 인물은 뱃사람으로서 바다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최대한 펼쳤을 뿐 아니라,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국익을 위해서 음지에서 통용되는 능력을 양지로 끌어왔다는 점에 대해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