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항하고 나서 도선사님들이 pilot boat로 하선하시고, 육지로 되돌아가는 pilot boat를 보며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삼항사 때 기억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한국 출항하고 나서 배를 떠나 육지로 되돌아가는 pilot boat를 보며 나 좀 여기서 구해줬으면, 같이 육지로 데려가줬으면, 하고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출항할 때 삼항사는 브릿지에서 main engine telegraph를 잡고 선장님의 order에 따라 조작한다. 이제 막 승선한 배에서 출항 operation에 긴장하던 삼항사는 어떤 말을 듣게 되는데… 순화하자면 “너 같이 여자가 배를 타니까 남자애들이 배 탈 자리가 없는 거 아니야 “
이어지는 비슷한 여러 말들에 출항 업무는 집중도 잘 안 됐고, 보다 못한(?) 도선사님 두 분이 화제를 돌려보려 했지만 그것마저 잘 되지 않았다.
도선사님이 배에서 하선하실 때는, 삼항사가 pilot station까지 에스코트를 하는데, 브릿지를 빠져나와 내려가는 중에 도선사님이 나에게 물어보셨다.
차항이 어디라 그랬죠?
콜롬비아입니다.
… …삼항사 고생 좀 하겠네요.
아, 네.. 괜찮습니다.
괜찮다 했지만 괜찮진 않았다. 그때 육지로 떠나가는 pilot boat를 보며 저분들은 육지를 향하고, 나는 콜롬비아로 향하는 망망대해 배 안에서 고립된다는 게 너무 아쉽고, 마음이 무겁고, 무서웠다.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그 바짓가랑이마저 내 손안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별 생각을 다 하게 됐다. 한국을 떠나 콜롬비아로, 콜롬비아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순간들이 끝나지 않고 도망갈 곳 없는 영겁의 쳇바퀴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갇힌 곳에서 나를 구제해 줬던 유일한 것은 나 자신, 그리고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흐르니 그 배에서 하선하는 날도 다가왔다.
이제는 나도 이해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남성의 일터였던 곳에서 여성은 모난돌일 수밖에 없다는 그 프레임을 이해한다. 남성의 일터에서 어린 여성인 내가 일하며 똑같이 돈을 버는 것을 보며 얼마나 싫고 미웠을까, 그래서 나에게 그랬을까…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별로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세상이 바뀌었다느니 성평등이라느니 그런 얘기에 별 호응이 안 간다. 오히려 그 시간들 동안 나에게도 프레임이 생겼다. 남성의 일터에서 여성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헤아리는 시각이 생겼다.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그 외의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은 육지로 되돌아가는 pilot boat를 보며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만 지금보다는 어렸던 시절의 내가 생각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