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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리의 사색가 May 20. 2024

염세주의 만세!

과거 내가 염세주의에 빠지게 된 계기

염세주의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부정적이며 좋지 못한 시선으로 세상을 왜곡되게 보고 있다거나 아님 오히려 염세주의적인 시선이 현실을 현실자체로 느끼고 거짓이나 환상처럼 어떤 얇은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 정확하게 관찰하며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아주 매력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쪽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정답은 없지만 과거 나는 후자 쪽으로 더 끌렸던 것 같다.





처음 쇼펜하우어를 만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였다. 그때 나는 한창 추리소설에 빠져 있던 시기였고,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포함해서) 친구 사귀는 것보다는 추리소설이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약간의 우울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영향 때문인지 아님 요즘 들어 삶이 무료한 것인지. 도통 무엇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때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라는 책을 만났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문학을 즐기면서 알게 된 것은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들은 모두 삶에 관한 질문들이었고, 정확히는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 내용들이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가? 


삶은 관점의 차이인가? 아님 진실된 무엇이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들을 수도 없이 던져보았으면 무엇하나 확실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보게 되면서 염세주의적 사고나

쇼펜하우어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글 분위기를 따라가면서 조용히 혼자 흥얼거리며 그의 글에서부터  영감을 받아  자신만 언어로 나만의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그 당시에 나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자체를 삶의 지표라도 되는 듯이 그를 전적으로 수용했으며 단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그가 세상을 아주 제대로 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책 행복론과 인생론에서는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직관적이며 지혜와 통찰이 묻어난 글들도 있지만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나 과거 그리스의 철인들이 한 말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바쳐줄 문장으로 활용함으로써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멍하니 빠져들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면서 당시에 나는 그의 글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글에서부터 영향받아 내가 쓴 글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면 아마추어 철학자 같은 느낌의 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썼던 글을 읽어보면 약간은 유치하기도 하고 당시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질문들도 있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계속 이어진다.



잠깐! 여기서 이 글은 분명히 말하지만 아마추어적이며 이제 막 새로운 세계에 빠진 한 고등학생의 글일 뿐이니. 너무 예민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22년 10월 21일

나는 신과 같은 우상들에게는 우리 같은 피조물들이 그들 자신들을 우러러보기 위해서 우리 같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가 전능하시고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런 존재일지는-그들은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도 확인할 일도 없는 그런 상황에 오직 단 하나의 믿음으로만 신 존재자체를 믿고 있다는 게 참 우습기만 하다.ㅡㅡㅡㅡㅡ

경건함이라는 감정은 사실 인간들이 깨우쳐서 만든 것인데. 인간들 스스로는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부여한 일종의 본성 비슷한 것이라고 스스로가 정해놓고 스스로가 그 우상을 믿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신이 인간의 형성을 닮았다고 하는데 그건 신이 이질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ㅡㅡㅡ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두고 그것을 이성이라고 하는데. 이 이성이라는 도구는 선한 행위로써 기인하는 것보다는 악한 행위를 하는데 더 많은 부분에게 쓸모를 발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의 나는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고 바라본 것 같다. 그리고 오류들도 꽤 많았던 시기였다.  이 글은 22년 10월 21일쯤에 쓰인 글로 <신존재 의문>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이다.

조금은 나를 들어낸 것 같아 창피하지만 당시의 나는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는지를 확실하게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살짝은 그 내용을 보여줘야만 할 것 같아. 이렇게 글로 보여준 것이다.

아무튼 나는 염세주의 또는 비관적 현실주의에 제대로 빠져들었으며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때는 쇼펜하우어의 견해를 바탕으로 글을 써 논설문 부문으로 전교 2등을 한 적도 있었다. 하긴 하루종일 시간만 났다 하면 쇼펜하우어적인 글들이나 니체적인 느낌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로 둔 나름 근거 있는 글들을 취미 삼아 써왔는데.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나름 설득력 있게 보였던 것 같다.




지금은 완전한 비관주의자로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글이 비관적이다'.라고 규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그의 글이 비관적인지 아님 진정 현실을 깨우친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염세주의 만세!라고 지었지만 찬양할 정도로 맹신하지는 않는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나에게 약간은 도움이 되기도 다.



정리하면 내가 그의 글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비관적이며 동시에 힘 있고 강한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판단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진정 제대로 살아보거나 직접 느껴보기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무조건 믿는 것은 약간은 오류를 범할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철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철학을 통한 삶에 대한 질문들과 의문에 대해서는 나름 뚜렷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의 책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도 읽어본 적도 없다. 그 책을 읽으려고 하니 그의 논문 <충족이유율에 한 네 가지뿌리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어야 하고(그가 서문에서 이야기했다.) 동시에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철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요구하는 것이 많고 이해되는 것은 없다 보니 지금으로서는 그의 전체사상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책인 행복론과 인생론만 보고서 그저 내 솔직한 의견을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염세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가진다. 그동안 이 글을 쓰면서 염세주의라는 단어를 여러번 썼지만 내 주장과는 다르게 편히를 위해서 그렇게 썼을 뿐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의 글은 여러 측면이 있지만 현실적이며 동시에 솔직하며 힘있으며 삶의 지표로 사용하기에도 좋은 말들도 많은 것 같다.




요즘같은 시기에 쇼펜하우어가 인기있는 철학자로 책이나 영상등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어쩌다가 한번 슥 지나가면서 그의 말을 들어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내가 지금까지도 몇번 인용하기도 하고 내 인터넷 노트 제목 밑 부제목에도 작성되어 있는 문장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라비아의 격언으로 이 문장을 인용했다.




침묵의 나무에서는 평화의 열매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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