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생각하는 내 속에 있는 허영과 만족
전남 강진에 가면 무위사(無爲寺)라는 절이 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극락보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1982년 극락보전 해체수리과정에서 벽 뒤에서 명문이 발견되었고 벽화는 떼어져서 성보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아직도 극락보전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도와 내벽 사면 벽화 등이 문화재인 곳이다.
처음 무위사에 갔을 때는 작은 극락보전 건물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벽을 수리하려고 할 때 무너진 벽 사이로 그 이전에 있었던 벽화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건물 외벽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보며 주지스님이 긴 설명을 해주셨다.
천년고찰이라는 곳을 가면 기시감 같은 것이 있기도 하다. 낡은 법당의 마룻바닥, 단청이 벗겨진 천장. 그리고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신 불상. 계단에 앉아서 볼 수 있는 먼 산까지. 기억할 수 없는 그 먼 전생 언젠가 그곳에 머물렀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 때 그곳을 다시 가고 싶어 진다.
여행을 어디로 갈까는 막연히 책이나 티브이에서 보면서 가고 싶다고 생각 들었던 곳도 있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곳을 정하기도 한다, 한동안을 어려서 엄마와 같이 다니던 곳을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여행이 가고 싶어지면 아침에 작은 가방을 하나 메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서울에서 강진까지는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강진 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를 타면 된다. 강진에 가던 날은 태풍이 지나간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도착한 강진은 태풍이 아니라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강진 터미널에서 무위사까지는 도민(道民)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한 가지 단점은 도민 버스 시간표가 1시간 30분에 한 대가 있고 4시 반이면 끊어진다는 것이다. 곳곳에 꽃무릇이 피었고 월출산 자락에 있는 녹차 밭에도 꽃이 피어 있었다. 벼가 익어가는 논길을 따라 숙소인 한옥마을까지 무작정 걸어갔다.
여행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각기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긴 모든 행동에 각자의 생각과 생활이 묻어 있는데 여행에 이유가 다른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화려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지도 화려한 곳을 고른다. 백화점, 명품 아웃렛의 존재나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고 그곳에서 사 온 물건들을 자랑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절대 우리나라보다 가난한 나라는 가지 않는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배울 것도 없고 더러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그런 곳의 문화는 볼 것도 없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유명한 여행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누구누구가 갔다 왔다는 곳에 가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폐사된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는 간이역인 일영역이 BTS의 뮤직비디오에 나온 후로 아미들의 성지가 되기도 한다.
갔다 온 나라의 숫자를 세는 사람들도 있다. 유엔에서 인정한 나라의 수는 196개국이라는데 얼마 큼을 다니면 그 나라들을 다 가볼 수 있을까 계산해 본 적도 있다. 일 년에 5개 나라씩 40년쯤 다녀야 한다. 십 년쯤 계획해서 세계여행을 하면 다녀 볼 수 있겠다 생각했었다.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를 무엇일까? 화려한 여행을 좋아하지도 명품이나 유명한 여행지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오지(奧地)를 다니는 것이 좋고 낯선 분위기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것 같다. 어려서는 방학 때마다 지방에 있는 친구 집을 순례하곤 했다. 집에서 허락받기가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서울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지방에 사는 친구들의 집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논과 밭을 지나가면 알려주는 풀과 작물의 이름은 아무리 들어도 알 수 없었고 과수원에 바로 따서 먹는 과일, 양봉하는 꿀통 옆에 날아다니는 벌들. 마치 영화 속에서만 본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낯선 지방에 처음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지방 특유의 냄새이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냄새, 그 냄새가 지금 내가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냄새가 온몸으로 퍼져 가면 숨죽여 있는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이제부터는 진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잠자고 있던 손끝 마디마디의 세포가 깨어난다. 낯선 것을 경험하는 것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의 내가 되는 듯 한 기분 여태껏 마음에 들지 않은 내 모습을 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마저 생기게 하곤 했다. 무언가 전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생존본능처럼 깨어나는 세포들을 느끼곤 한다. 살아있음의 확인이다.
그래서 여행이 좋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가 있다.
내 여행 중의 허영은 자유로움인 것 같다. 언제든 새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
사람은 누구나 각기 가지고 있는 허영이 따로 있는데 명품을 가져야 하는 사람은 그 명품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고 자신을 꾸미고 가꿔야 하는 사람은 자신을 예쁘게 치장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만족할 수 있다. 누군가 앞에 나서야 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명령해야 만족할 수 있고 돈이나 명예가 중요한 사람은 그것이 있어야 만족한다. 모두 각자가 가진 허영이 다른 것이라면 어떤 것이 맞다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자기가 가진 허영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각자의 성향이 다른 부분이다. 그리고 나의 허영은 고인물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가지려고 하고 있다는 자부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