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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인형 Nov 15. 2024

파리에서 반나절

나의 방랑 

프랑스, 파리. 

문화의 도시에 오면서 문명의 낙후를 걱정했더랬다. 소매치기와 불어만 고집하는 불통의 사람들, 냄새나는 거리와 낙후된 공공시설들... 굳이 걱정을 하면서까지 이곳에 와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이건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하자. 


애써 가장 짧은 시간 동안 파리에 머물 동선을 짰다. 낯선 나라에서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을 익히고 배울 시간, 가령 지하철 표를 끊고 타는 법이라든지 물건값을 치를 때 그들이 선호하는 방법, 가장 노멀 한 레스토랑 음식과 대체적인 가격 등등이 그것이다. 숙소를 정할 때도 파리를 둘러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 다음 목적지로 떠날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를 고르다 보니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의 작은 호스텔로 결정이 됐다. 


파리에서 반나절, 도미토리 침대 하나.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인상은 생각보다 모던하고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전 날 온 비 때문인지 거리에 악취도 없었고 파리 올림픽이 끝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치안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11월은 1년 중 관광객이 가장 적은 때라 모든 곳이 적당히 한산했다. 


함께 체크인을 마친 빨강머리 아가씨에게 뭘 할 거냐 했더니 밥을 먹으러 간단다. 메뉴를 묻자 자기가 파리에 오면 늘 가는 곳이 있는데 '프렌치-프렌치' 스타일이라고 했다. 첫 끼에 의미를 두고 싶었던 나는 함께 가도 되냐고 물었고 흔쾌히 승낙해 준 덕분에 파리 여행은 순조롭게 시작이 됐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오늘 안에 먹겠나 싶었는데 그녀가 가장 앞으로 걸어가서 줄을 끊고 입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서 젤 먼저 자리에 앉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다리에 약간의 장애가 있었고 파리에서 모든 시설은 장애인과 유모차에 앉은 아이들을 우선으로 입장시키는 문화가 있었다. 


그녀의 도움을 얻어 양파수프, 오리가슴살 구이 그리고 디저트로 에스프레소와 파인애플 카르파치오를 주문했다. 가장 프랑스적인 것들로 골랐다. 양파수프는 수프그릇이 치즈로 밀봉된 형태였는데 치즈를 가르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수프가 나왔다. 수프에 식빵을 찍어먹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오리가슴살 구이는 감자와 소스가 함께 서빙이 됐다. 퍽퍽할 거라 생각했던 오리 가슴살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오리가 익숙한 고기는 아닌지라 마지막에는 두꺼운 껍질이 조금 힘들었다. 아마도 배가 불러오기 시작해서 그랬던 것 같다. 파인애플을 얇게 저며서 라임과 생강, 민트로 만든 소스를 위에 뿌린 카르파치오는 오리 고기의 느끼함을 싹 거둬줬다. 마지막 에스프레소까지 아주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두 시간쯤 걸렸고 그 사이 빨강머리 아가씨, 다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독일과의 국경에 있는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도시에 살고,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다고 했다. 대부분 파리에 있는 친구와 함께 지내는데 친구가 여행을 떠나면서 우연히 나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미술 학교에 갔지만 그들이 정해놓은 규율이 맞지 않아서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맥도널드에서 일을 하며 개인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25살의 아가씨는 많은 부분이 나와 잘 맞았고, 특히 여행에 관한 관점들이 잘 통해서 오래도록 지루하지 않게 얘기할 수 있었다. 

취침 시간을 제외하면 파리에서 반나절의 반나절이 그녀와 밥을 먹다가 훌쩍 지나가 버렸지만 아쉽지 않았다. 나의 여행을 빛나게 하는 순간들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서 여행을 떠났고 그 첫날 그녀와의 만남은 이전의 설렘을 상기시켰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과 나눴던 순간들이 강렬하게 심장을 때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행이 점점 단순해진다. 생각해 보면 파리의 더러움쯤은 그저 웃을만한 게 아닌가. 배앓이까지 해야 했던 인도나 쓰레기로 가득 차 있던 네팔의 강이나 끝없이 피어오르던 흙먼지의 아프리카 길을 생각하면 무엇도 아닌 것인데, 그때 나는 그대로 벅차게 행복했으면서 단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가리는 게 많아졌으니 말이다. 


그녀와의 이별 후 에펠탑을 향해 걸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에텔탑은 거대하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은 휘영청 떠올라 있었고 차가운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했다. 이상하리만치 쓸쓸한 밤이었다. 파리는 쌀쌀하고 쓸쓸했다. 파리는 계절도 날씨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파리는 그냥 밤이 아름다웠다. 유명한 구조물을 향해 환하게 쏘아 올린 조명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도시의 조명은 어두웠고 사람들의 걸음은 빨랐다. 

파리의 낭만은 우울이 닿아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행의 들뜸을 이기는 말랑한 쓸쓸함이 있었다. 언뜻 나와 잘 맞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 수다스러운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곳은 내가 무척 사랑할 수 있는 도시가 될 것도 같았다. 


쌀쌀한 날씨 탓에 휴대폰 배터리가 무섭게 떨어지고 있었고 숙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카페를 찾아 충전하고 싶었지만 쓱 훑어본 윈도 안에는 콘센트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으므로 서둘러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 야경을 감상했다. 별 거 없었다. 해가 진 후 그곳은 그저 깜깜하고 운동하는 이웃들로 가득한 우리 동네 뒷동산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파리에서의 시간이 끝났고 다음 날 일찍 샤르빌레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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