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여행의 중간 그 어딘가
대학교 시절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지원할 때 싱가포르와 홍콩을 비교하면서 어느 나라로 갈지에 대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그때, 홍콩이 아니라 싱가포르를 선택했다면 지금 나의 삶은 정말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홍콩보다 싱가포르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열려 있기 때문에 어쩌면 나의 커리어를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부유한 나라에 항상 손에 꼽히는 싱가포르는 언제나 마음속에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였지만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끌리는 나라는 아니었다.
싱가포르에 처음 발을 디뎌본 것은 20대 후반의 작년 9월이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당시 싱가포르 팀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고 있었고, 팀 프로젝트가 끝나가는 9월의 마지막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간 함께 일했던 팀원들에게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향했다.
당시 코로나로 인해 아직은 해외여행이 편하지는 않았을 시기였기 때문에 9월 주말의 공항은 매우 한산했다. 이미 지난 8월 달에 태국에 다녀왔기 때문에 공항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지만 내심 다시 올라타는 비행기에 너무도 설레었다. 6시간 동안 바다를 건너 싱가포르의 창이 공항에 가까워지니 조금씩 말레이시아의 땅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먼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말레이시아 친구와 싱가포르 투어를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절대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내가 맡고 있던 브랜드의 프로젝트는 늘 말레이시아 팀과 함께 논의하고 최종 수입 물량에 대한 의사결정을 진행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팀원들 이상으로 말레이시아에서 나와 같은 브랜드를 담당하던 담당자와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출장 일정이 확정되자마자 그는 더 이상 같은 브랜드의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동료 직원이 아닌 친구로서 싱가포르의 주말 가이드가 되어주는 것을 흔쾌히 승낙했주었다.
싱가포르의 9월의 해는 생각보다 길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마리나 베이 샌즈 (Marina Bay Sands)와 가든 바이 더 베이 (Gardens by the Bay)를 지나 숨어 있는 로컬들의 맛집으로 향했다. 이곳은 실외의 푸드코트로 호커센터 (Hawker Centre)로 다양한 로컬 맛집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관광객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현지인들도 정말 많았다.
대개 호커 센터의 경우는 싱가포르의 아파트 단지 내에 있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공원의 한가운데 있었다. 호커 센터의 장점은 비싼 물가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좀 더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곳은 여타 다른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식당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나베이 샌즈가 보여주는 도시국가의 위용은 잠시 접어두고 동남아시아의 느낌을 물씬 풍겨냈다.
자리를 잡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보니, 테이블 위에 조그마한 티슈들이 곳곳에 올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쓰레기가 아니라 자리를 맡아두기 위한 싱가포르식의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처음에 스마트폰을 올려두고 가려했지만 친구가 스마트폰을 치우고 자신의 티슈를 올려두며, 싱가포르에서는 가급적이면 가방, 스마트폰, 지갑 등의 귀중품으로 자리를 맡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싱가포르의 첫 번째 저녁의 교훈은 한국만큼 치안이 안전한 곳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싱가포르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마리나 베이 샌즈로 돌아왔다. 이곳은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야경이 유명한 곳이었고, 특히 인피니티풀은 개장부터 현재까지 야경을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야경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한 껏 기대하고 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는 뷰는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실망했다. 우선 마리나 베이 샌즈 앞에 위치한 건물들이 마리나 베이 샌즈만큼 독특하고 아름답지 못한 채로 단조로웠다. 뿐만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홍콩의 야경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싱가포르의 야경은 자그마한 호수 건너편에서 보는 야경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경의 감동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정면에서 본 금융센터의 야경이 아닌 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과 가든스 바이 더 베이 (Gardens by the Bay)의 야경이었다. 사실 싱가포르에 출장을 오면서 다른 관광지는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꼭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외형적인 독특함과 실내 정원 때문이었다.
특히나 마리나 베이 샌즈의 꼭대기가 아닌 정원 안에 들어가서 야경을 보았더라면 더 예뻤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멀리 서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야경을 볼 수 있었던 점이 다행이었다.
계획도 없었던 출장 덕분에 처음 방문한 싱가포르는 대학생활 때, 상상으로만 그려봤던 모습과는 다르게 어쩌면 괜찮았을 수도 있겠다는 첫인상을 주었다. 물론 아직 본격적인 물가를 체험해 보기 전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싱가포르의 며칠이 꽤나 기대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