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여행기
10년 전 10월, 배낭 하나를 메고 기차 여행을 하였다. 그때 나는 아비뇽을 거처 남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도시의 아침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관광사무소에서 지도 하나를 의무적으로 빼어 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 산책을 했다. 도시라고 하기엔 정말 작은, 그렇다고 동내라고 하기엔 또 있을 건 다 있는 그런 도시였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도시 감싼 성벽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점심쯤엔 도서관 앞 공원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점심으로 산 샌드위치를 까먹었다. 건너편에 작은 미술관이 보이길래 자전거를 매어 두고 계획 없이 들어섰다. 시간을 때우고자 들어간 미술관에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고 기분 좋게 나오던 길이었다. 같이 미술관을 관람했던 아시아계 중년 여성과 마주치게 되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표정이 온화한 단발의 여성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D'où venez vous?
어디서 오셨어요?
당시 나는 프랑스의 남쪽 끝단에 있는 도시에서 어학을 하고 있었는데 막 언어를 배우던 참이라 나의 어쭙잖은 불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렬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베트남계 약사인 그녀는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프랑스로 이민 온 2세대였다. 파리에서 사는 그녀는 주말에 홀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딸이 생각나서 내가 궁금했던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방인으로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종에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할까? (사실 처음부터 환상이라는 게 존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토막 난 프랑스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레이시즘, 제노포비아... 한국에서는 그저 남에 일 같이 느껴졌던 이러한 이슈들을 처음으로 직접 보고 느끼던 시기였다. 그녀는 나의 근심 어린 질문들에 나를 다독이듯이 말해주었다.
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고 또 좋은 사람도 있어, 이 모든 문제를 이해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해. 더 많이 좋은 것을 보고 즐겨! 나쁜 기억을 안고 가기엔 젊음이 아깝지 않아?
그녀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였는지 깨닫기엔 10년여 정도가 걸렸다. 이 대답은 지금도 완벽한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중년의 그녀가 어린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날 밤 상영하는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난 계획 없는 여행자이니깐 그녀의 말을 따라 그 영화를 보러 갔다. UTOPIA(참 신기하게도 이름이 유토피아였다)라는 작은 독립 상영관 앞에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영화관으로 들어가서 관람을 시작하였다.
그 영화가 바로 이란계 프랑스인이 만든 Persepolis 영화였다. 이란과 프랑스 두 문화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자라난 이란 여성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이었다.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이란으로 돌아와 이란의 봄을 겪게 된다. 비상식적 군부 체재에 대한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는 여정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엔 달리는 택시 안에서 본인이 증오하며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 달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그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쉽사리 스크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 영화 속 여인이 결국 어디로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비뇽으로 살게 되었고 돌아 돌아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유토피아는 없었다.
특별할 것 같았던 이곳의 아름다움은 어찌 여행에서 끝나는 것 같았다.
문화적 차별과 무분별한 편견…아시아인 여성으로 유럽에 살아가면 누구나 이러한 씁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프랑스에서 사는 시간 동안 이것들은 마치 만성질환처럼 나를 괴롭혔다. 참 다행히도 이 덕에 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아니라도 그렇다고 하자). 이러한 문제들을 내 삶의 원료 삼아 동기부여로 내 학업에 대한 에너지로 사용했다. 하지만 오랜 골몰이 나에게 무기력감을 주었다. 이윽고 큰 우울의 골짜기에 발을 딛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더 이상 화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 화에 물을 붓고 이 불씨가 사그라든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들을 키워 나가기로 다짐했다. 내가 살아갈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이곳에 더 나은 나를 키워나가고 싶다. 난 이 마음에 잔잔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줄 것이다 그리고 작은 행복들을 더 절절히 껴안을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여행 중이다. 이방인으로서 하루하루를 여행 중이다.
내가 선택해서 돌아온 이곳이 가끔은 날 질리게 할 때도 있지만 너무 얄밉게도 사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가끔은 쓰기도 달기도 한 일상을 내 손 끝의 붓과 팬으로 이야기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