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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Feb 13. 2024

안성(安城)으로 간 경상도 남자


'금주 일요일(12월 12일) 출근하시는 직원들께서는 본부에서 정해드린 각계(各係) 별 시나리오대로 빠짐없이 전산 테스트하시고 퇴근 시 이상유무와 상관없이 지점장이 직접 관할지역 본부에 보고하고 퇴근하시기 바랍니다.'


1999년 12월 8일

내가 다녔던 은행 본점에서 각 영업점에 이렇게 공문이 왔다.


그때 은행은 물론이고 관공서 등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관에 비상이 걸렸다.

지금껏 1900년대를 사용하던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서버에러를 일으키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 때문에 며칠 후면 곧 다가올 2000년에 대비하여 전산담당 주무부서에서 컴퓨터에 2000년을 가정해서 휴일인 일요일에도 직원들을 출근시켜서 시뮬레이션을 한 것이었다.

    

고객의 소중한 자산을 보관하고 있는 은행에서의  전산서버 에러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 때문에 내 기억으로 거의 수년간에 걸쳐 에러에 대비한 준비를 해왔던 것 같다.

 ** 그때 은행에서는 고객들의 금융거래 모든 것을 따로 back-up을 받아서 보관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행히 2000년 1월 3일

2000년 첫 영업일.

우리가 염려하고 우려하였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류는 아무 탈없이 세 번째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해 8월 7일

월요일이었다.


출근은 평소처럼 하였지만 그날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하반기 인사가 있는 날이었는데 그 인사에 승진인사와 이동인사가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


승진자격고시 시험을 통과해 놓은 나는 그날 내심 승진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고 2년을 넘게 기다렸으니 기대감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건물을 쳐다보았다.

'오늘이 이 건물 마지막 근무일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1년을 더 근무해야 할까?'


그런 내 생각은 이내 '이곳에서의 근무가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로 바뀌었고 나도 이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통속적인 내 인사에 먼저 출근한 직원들이 같은 말로 인사하였다.


내가 자리에 앉는데 나보다 1년 후배 계장이 내 자리로 와서 한 마디 한다.

"오늘 승진 발표일이지예?

아마 계장님한테 좋은 소식이 있을낍니더"


말하는 그 후배님의 눈이 빛났지만 내게는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다.

"인사를 우예 아노?

그래도 말이라도 그래 해주이끼네 고맙기는 하다"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의례적인 말로 대답하였다.


"계장님~

내가 어릴 적부터 꿈이 기가차게 맞았거던예.

어젯밤 꿈에 계장님이 지점으로 들어오는데 머리에 어사화(御賜花)를 쓰고 들옵디더.

오늘 승진인사에서 분명 계장님이 승진할낍니더.

지금까지 내 꿈 틀린 적 한 번도 없었습니더"


후배는 거의 확신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날 오후

승진자 발표에 정말 내 이름이 있었다.

후배의 꿈은 정말 틀리지 않았다.


이제 나는 행원이 아닌 책임자가 된 것이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책임자가 되면 임명장 성격의 사령장이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 사령증은 은행장을 대신하여 지역본부장이 수여하였다.


내가 근무하던 지점에서 본부장님이 계신 지역본부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지만 그날 나는 2분 만에 지역본부까지 걸어서 갔다.

내 두발은 한 번도 땅에 닿지 않았고 나는 날개로 날아서 갔다. ( 내 느낌상 ㆍㆍㅎㅎ)


본부장님이 주신 사령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명 : 이종열

직위 : 계장


위 직원을 안성지점 4급 대리로 임명함.

                                    2000년 8월 7일

                       은행장  김 xx


안성?

안성이 어디야?


난생처음 듣는 지역이었다.

승진에 대한 기쁨과 기대감이 발령받은 낯선 근무지보다 훨씬 컸지만 안성이라는 곳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다.


그때 은행 사정상 대구, 경북지역에 책임자 T/O가 너무 많아 그날 나와 같이 승진한 15명 모두 대구와 경북을 크게 벗어난 지역으로 발령이 났었다.


얼른 지도책을 꺼내 찾아보았다.

헉!!!!

경기도에 안성(安城)이 있었다.

경기도에는 연수를 받으러 잠깐씩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생활경험은 전무하였다.


발령이 나고 3일 후 안성으로 가야 했다.


나는 지독한 3치다.

몸치, 기계치, 길치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그때 나는 전날 미리 안성지점에 전화해서 대구에서 소요시간, 지점위치를 묻고 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차를 달렸다.


난생처음 가보는 지역에 대한 어색함보다 이제 내가 책임자가 되었다는 설렘이 더 커서 그런지 몸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자동차 시계가 6시를 가리켰다.

대전을 막 지났다.

어제 안성지점 직원이 알려준 말에 의하면 대전을 지나면 딱 절반을 왔다고 하였다.


기가 막힌다.

누가 우리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했을까?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지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에게 부임인사를 받으신 지점장님, 차장님께서 이내 전 직원들을 객장에 모이게 하고 나더러 부임인사를 하라고 하신다.

"안녕하십니꺼?

대구에서 온 이종열 계장입니더.

그제 책임자 발령을 받아가(받아서) 여러 가지로 마이(많이)부족합니더.

마이 가르치 주이소.

그라고 잘 부탁할께예.

대신에 저는 열심히 하겠심더." 


십수 년을 입에 달고 살았던 계장이라는 단어가 아직 내 입에 붙어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내 입으로 나를 대리라고 하기에 조금 쑥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인사말을 하고 있는데 줄지어 선 뒤쪽에서 여직원들이 입으로 손을 가리고 킥킥 웃는다.

가뜩이나 어색한 분위기에 뻘쭘해하던 나는 일순간 당황스러웠다.

'왜 웃지?

내 머리가 이상하나?

넥타이가 삐뚤어져있나?"


인사를 마치고 내 자리에 앉았다.

입행 후 지금까지 늘 객장에 있었던 내 자리가 뒤로 빠져 후선에 있었다.

책상에는 [대리 이종열]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고 지점을 대표하는 직인과 약인이 통에 담겨 놓여있었다.


내가 책임자가 되었구나

실감되었다.


자리 정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조금 전 나를 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던 여직원이 의자를 돌려 나를 보고 한마디 하였다.


"대리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제가 TV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고 들었던 경상도 사투리를 실제 들어 본 것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어요.

기분 상하셨어요?"


"아이고 언지예.

뭐 그런 일로 기분이 상합니꺼?"

조금 당황은 하였지만 기분은 상하지 않았노라 여직원에게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아니 조금 전 객장에서 대리님이 인사말씀 하실 때요....."

여직원 말끝이 흐려졌다.


'언지예'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경상도 말인데 그 여직원은 언제 그랬느냐고 알아 들었나 보다.


태어나서 난생처음 와 본 경기도 안성이라는 지역

태어나서 난생처음 근무해 보는 안성지점 직원들

태어나서 난생처음 해 본 책임자로의 근무


모든 것이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나는 익숙하지 않았고 어색함을 익숙함으로 바꾸려는 마음에 시간만 화살처럼 흘러갔다.


"대리님~

우리 지점 구내식당 위치 모르시죠?

오늘은 저와 같이 가셔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예금상담창구 직원이 내 자리로 와서 환하게 웃는다.

시계를 보니까 12시다.


아~

그래

점심

먹어야지


여직원을 따라 구내식당으로 갔다.

구내식당은 2층에 있었는데 6명이 앉아 식사를 할 수 있게 식탁 양 옆으로 의자 6개가 놓여있었다.

아담하고 정겨워 보였다.


식당으로 안내해 준 여직원이 식당아주머니께 나를 소개해주었다.


"아지매.

반갑심니더.

멀리 대구에서 온 이종열 대리라 캅니더.

맛있는 밥 마이 주이소.

잘 부탁할께예"  


"예 대리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식당아주머니가 내 인사에 답을 하자마자 이내 돌아서셨다.

돌아서자마자 아주머니 손이 자신의 입으로 가고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웃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지매

잘 묵었심니데이

내일 또 오께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머니는 또 돌아서셨고 또 어깨가 들썩였다.


지점 주요 고객분들이 지점으로 오실 때면 다른 책임자들이 나를 불어 그분께 인사를 시켰다.

나는 똑같은 말투로 고객님들께 인사를 하였다.


어떤 고객분들은 웃으셨고

어떤 고객분은 "아~우리 대리님이 경상도 사나이 이시구나"하시면서 나를 반겨 주셨다.

그 고객분도 돌아서서 어깨를 들썩이셨다.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후딱 가버렸다.

청원경찰분이 내리는 셧터소리를 듣고 시계를 보니까 4시 30분이었다.


마감결재를 하고 있는 내 자리로 지점장님이 오셨다.

"이 대리

오늘 하루 바빴지?

근무해보니까 어땠어?"

지점장님의 말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내 또 말씀하셨다.


"사실 안성지점이 개점을 하고 부임한 직원들 중에 경상도에서 온 직원이 이대리가 처음이야.

그래서 오늘 고객분들과 직원들이 이대리 말에 웃었던 거야.

기분 나쁘지 않지?"


"어데예

그런 일로 기분 나빠하마 안되지예

괴안심니더."


'언지예' 하면 또 지점장님이 못 알아들으실까 '어데예'라고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지점장님은 또 못 알아들으셨지 싶다.

'언지예'와 '어데예'는 같은 말로 쓰인다.


안성은 좋았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논과 밭이 있었고 그 논과 밭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인심이 후하셨다.

꼭 고향에서 근무하는 기분이었다.


안성지점 근무 일주일쯤 되던 날

나는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었다.

안성지점 VIP고객 중 한 분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일죽면(一竹面)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부업으로 소와 토끼 등 가축을 기르시면서 생활을 하고 계셨다.


차장님이 그 고객분은 좀처럼 지점에 내점을 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같이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하셨다.


지점에서 자동차로 20여분의 거리에 그 고객님의 자택과 농장이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집과 농장은 내가 평소 꿈꾸어 왔던  그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나는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집이었는데 정말 잘 가꾸어진 마당과 정원의 모습에 내 입은 좀체 다물어지지 않았다.


차장님과 내가 도착하자 마당에서 인기척을 느낀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첫눈에 저분이 차장님이 말씀하신 그 VIP고객님 이시구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첫인상에서 나의 열린 입이 더 커졌다.


하얀 머리에 하얀색 모시적삼을 입고 하얀색 고무신을 신고 나오셨는데 너무나 곱고 우아한 차림이셨다.

사모님도 같은 모습이셨고 고우셨다.


"안녕하십니꺼?

지난주에 안성지점으로 발령받은 이종열 대리입니더.

대구에서 왔습니더.

잘 부탁드리께예.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드리야 했는데 마이 늦었습니더.

송구합니더."


내 첫인사에 두 손을 꼬옥 잡으신 고객님이 말씀하셨다.

"부탁은 제가 드려야지요.

우리 이대리님 경상도 사나이시구나.

대구말투가 참으로 정겹습니다.

하하하~~~"


집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신 고객님이 거실에서 차 한잔을 내어 주셨다.

거실모습도 집 밖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풍(古風)스러운 분위기에 잘 정리된 거실의 모습도 내가 평소에 꿈꾸어 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안성이라는 도시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옛날에 이곳 안성에 오면 없는 것이 없다고 해서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는 말씀과 이 대리 같은 경상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안성탕면'이 이곳 안성에서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그동안 그저 안성맞춤, 안성탕면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방문한 김에 고객님의 농장까지 구경을 시켜 주셨다.

거주하고 계시는 자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 축사가 있었고 그 옆에 염소와 토끼가 소 축사보다 작은 우리 안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수십 마리의 닭들은 갇혀있지 않고 방목되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모이를 먹고 있었다.


"이대리님!

경상도에서는 염소를 무어라 부릅니까?"

잘 정리된 농장의 모습과 규모에 넋을 놓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고객님이 물으셨다.


"아!

염소예?

염소는 경상도에서 보통 '얌세이'라캅니더."

내가 대답하였다.


"얌세이??~~

으하하하하하~~"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것으로 보아 아마 '얌세이'라는 말은 처음 들으신 듯 보였다.


"그러면 토끼는요?"

또 물으셨다.


"토끼는예

토께이라 캅니더."

내 대답에 그 고객님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으셨다.


"그럼 돼지는 돼지께이라 그럽니까?"

아직 웃음기를 얼굴에서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신 고객님이 이번에는 돼지를 물으셨다.


"돼지예?

돼지는 맹 돼지라 캅니더."


"아!!

돼지는 맹돼지라고 하는군요."

 -- 경상도에서 맹은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뜻으로 이야기합니다.

     지금도 거기에 있다는 말을 맹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곳 안성에서 딱 1년을 근무하고 다시 대구로 발령받아 내려왔다.


지금 나는 가끔, 아니 자주 나의 첫 책임자시절 안성이 그립다.

그때 같이 근무하였던 직원들과 낯설어하는 나를 너무나도 따뜻하게 대해주신 안성지점 고객님들도 보고 싶고 그립다.


아무 일 없는 날

안성을 한번 가봐야겠다.

그때의 사람들은 볼 수가 없겠고 모습은 많이 달라지고 변했겠지만 안성이라는 곳은 그곳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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