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열 Feb 29. 2024

잘 계실까?

내가 살고 있었던 집과 내가 근무하였던 사무실과는 정확히 50km였다.

그때 나는 매일 100km를 자동차로 출퇴근 하였다.


1996년

대구에 살고 있었던 내가 대구인근 외 각지 구미로 발령이 났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외각지 구미로 발령을 자청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지점들을 두고서도 구태어 50km나 되는 외각지로의 발령을 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책임자 자격시험(그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때 은행에서는 '책임자 자격고시'라 하였다.)을 합격하고 인사고과에 플러스를 받으려면 은행장 표창장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표창장은 매년 발행수(數)도 매우 제한적이었을 뿐 아니라 발행수 대비 직원수가 너무 많아 어지간한 실적과 노력이 있지 않으면 그 상을 받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즈음 내가 근무하던 지점에서 모시고 있던 지점장님이 나더러 구미지점으로 가서 관리업무를 담당해서 해 보라고 하셨다.

관리업무는 더 정확히 말하면 연체관리업무인데 고객님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사용을 하시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대출금을 약속한 날에 제때에 갚지 못하게(연체 대출금)되었을 때 그 연체대출금을 관리하는 업무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잠시 원금(또는 이자) 상환을 미납하셨다가 바로 정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가끔 영영 그 대출금을 자력(自力)으로 갚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은행에서 정한 매뉴얼 대로 연체 횟수에 따른 관리를 하는 것이 관리계의 주 업무였는데 특이하게도 구미지점에서는 그 연체대출금이 지극히 적었고 또 연체 발생 후 아주 빠른 시기에 그 연체 대출금들이 정리되어 지점 연체실적이 다른 지점들에 비하여 매우 양호하였다.


그래서 그 지점장님께서 나에게 출퇴근이 조금 멀고 불편하여도 구미지점으로 가서 어려운 은행장 표창장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었다.


어차피 대구시내 근무기간도 꽤 오래되었고 지점장님의 추천도 있고 해서 망설임 없이 구미지점으로의 발령을 신고하였고 그 해 하반기 인사에서 실제 구미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하고 이내는 출납업무로 사무분담을 받아 6개월 근무하였다가 1997년 내가 원하던 대로 관리계로 사무분담을 받을 수 있었다.


역시 소문대로였다.

총대출금 금액 대비 연체대출금의 비율은 다른 지점의 그것에 비하여 현저히 낮았고 그 현실에 나는 여러 번 놀랐다.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쉬운 업무를 하면서 그 어려운 은행장 표창장을 받을 생각을 하니까 지금 자신의 일에 악전고투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생각들은 너무 앞선 생각이었고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 떡에 김칫국물이었다.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공짜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언제나 나를 피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고 자주 그런 결과에 익숙했었던 나는 공짜에 대한 기대는 애사당초 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떤 때는 미리 준비한 100장의 행운권 추첨행사에서 그날 참석한 사람이 102명었는데 행운상 경품을 받지 못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나였던 적도 있었고, 내가 산 로또복권의 30개 숫자가 실제 1등의 숫자와 단 하나도 맞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것은 지금도 똑같다.


나의 이런 징크스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해 우리 국민들에게 너무나 큰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던 IMF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던 비극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IMF

처음 우리나라에서 당시 재경부장관이 TV를 통해 특별담화방송을 하였을 때만 해도 그것의 위력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생각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위력은 거의 핵폭탄의 위력이었고 그 폭탄에 피폭된 국민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자고 나면 유명 대기업들이 도산하고 한번 설립되면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은행들도 문을 닫았다.

금리는 사람을 살리고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 아니라 가히 살인금리라는 이름을 달고 괴물처럼 국민들과 기업들을 휘젓고 다니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환율도 괴물의 탈을 쓰고 금리와 같이 망나니 춤을 추었다.


나는 그때 비교적 젊은 나이의 은행원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퇴직을 권고하는 말들은 듣지 않았지만 아무 잘못 없이 근무하던 나이 든 나의 선배님들은 본점으로부터 사직을 권고하는 노란 봉투를 받기도 하였다.

그 노란 봉투 겉봉지에는 붉은 글씨로 '親展'이라고 쓰여 있었다.

IMF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를 더 크게 실감하게 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관리업무에서였다.


IMF시대가 오고 이내 평소 내가 관리하고 접해왔던 연체대출금의 숫자보다 거의 100배나 증가한 숫자로 내 눈으로 들어왔다.

1억 원도 되지 않았던 연체대출금이 100억 원이 넘어서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단기간에~~

쓰나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들로 거의 매일을 출장 가야 했다.

법원 경매계, 신용보증기금,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 등.....


이쯤 되면 내가 바랐던 은행장표창장은 일찌감치 물 건너갔고 나 혼자 맡아서 해왔던 관리계에 인원이 2명이나 더 보충되어야 할 만큼 넘쳐나는 업무에 매일을 허덕여야 했다.

그때 나는 거의 매일을 평균 밤 11시가 넘어서 퇴근하였고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일요일에도 출근하였다.


그때쯤 특이한 연체대출금 한 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연체금액이 3백만 원이 조금 넘는 아주 소액의 연체대출금이었다.

*3백만 원이라는 돈이 소액이라는 것이 아니라 수억 원의 다른 연체대출금에 비하면 소액이라는 것이다.


돈을 직접적으로 빌려 쓴 채무자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않은 아들이었고 그 대출금의 연대보증인은 그 청년의 부모님이셨다.

대출금 연체관리 규정상 일정기간 대출금이 계속 연체 상태로 있으면 그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법적절차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에 선행(先行)하여 채무자와 보증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현 상황을 기록해야 하는 이른바 '실태 보고서'라는 것을 작성해야 했다.


실태 보고서 작성을 위해 채무자와 연대보증인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지점을 나섰다.

당시에는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이 없었기 때문에 미리 주소를 적어 목적지를 찾아야 했다.


지점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달린 곳에 목적지가 있었고 대문 앞 문패에 적혀 있는 주소가 내가 찾던 것과 일치하였다.

경북 김천에 있는 시골 마을이었는데 내 눈에 보이는 집은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 한 채였다.

마당으로 들어가서 본 집은 그런대로 정리가 잘된 집이었지만 마당 곳곳에 잡초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계십니꺼?"

내가 인기척을 하였다.


부뚜막에 낡은 신발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방 안에 사람이 계시는 것 같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안에 아무도 안계십니꺼?"

다시 물었다.


"누군교?"

목소리가 먼저 방에서 나오고 이내 방문이 열렸다.

연세가 일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나를 보며 앉아계셨다.


"예

저는 xx은행 구미지점에서 나온 이종열계장 입니더.

여기가 혹시 정xx씨 집 맞습니꺼?"

어르신께 정중히 인사드리면서 내가 말했다.


어르신이 방에서 일어나시면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일어나시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몸이 불편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계속 마당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방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한참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둘러본 방에는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만 있었다.

그래도 청결하고 깨끗해 보였다.

방안 어디에도 그 흔한 TV한대가 없었다.

 

"선상님요.

내가 사는기 이렇심더.

은행에서 와(왜) 왔는동 말안해도 내 다압니더.

그런데 지금 선상님이 보다시피 가(채무자인 아들)가 쓴 돈 갚을 돈은 물론이고 당장 때꺼리(끼니)도 없심니더.

선상님 보시다시피 이래 삽니더.

선상님 한테는 미안하지만도 그 돈 인자는(이제는)갚을수가 없심더."


말씀하시는 어르신이 얼굴은 들고 계셨지만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셨다.

시선을 당신 발아래에 두셨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어르신이 다시 말씀하신 요지는 이랬다.

당신의 아들이 친구 셋과 술을 먹다가 셋이 오늘저녁에 더 좋은 술집에서 술을 먹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당장 유흥에 쓸 돈이 없으니 한 친구가 자신의 집 근처에 혼자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집으로 가서 돈을 훔쳐서 오자고 했다고 하였다.

어르신의 아들은 그 모의에 적극 반대를 하였지만 이미 다른 친구 둘은 결심이 굳었고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어르신의 아들에게 만약  네가 이 일에서 빠지면 앞으로 니 인생이 고달파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의 어르신 아들은 지금 자신들이 모의하고 있는 범죄행각의 크기와 심각성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친구들과의 절연이 더 두려웠고 할 수 없이 그 일에 가담키로 했다고 하였다.

대신 범죄대상의 집 담은 넘지 않기로 하였고 밖에서 망을 보는 것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고도 하였다.


범행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들 셋은 검거되었는데 범행시간이 일몰 후 늦은 밤 시간이라 세명 모두 특수강도라는 죄명을 받아 지금 복역 중이라고 하였다.

그나마 다행히 다른 친구 둘은 주범이라 형량이 높았지만 어르신의 아들은 그동안의 정황이 참작되어 종범의 위치에서 그들에 비하여 형량이 낮았다고 하였다.


어르신이 말씀을 하시면서 몇 번이고 자식교육을 잘못시킨 자신의 잘못이라며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며 머리를 숙이셨다.

숙인 머리 앞에 놓인 재떨이에는 필터 끝까지 피우신 담배 몇 개비가 놓여 있었다.

담배 한 갑을 살 형편도 안 되는 듯 보였다.


지금은 단돈 1만 원도 없는 마당에 3백만 원이라는 큰돈을 도저히 자신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며 자신을 잡아서 경찰서로 넘기라고도 하셨다.

만약 은행에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기와집을 경매로 처분한다면 자신이 길거리에 나 앉는 것은 괜찮은데 이제 곧 형기(刑期)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 올 아들이 갈 곳이 없다며 울먹이셨다.


순간 그 어르신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천사 앞에 서 이는 악마처럼 느껴졌다.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들의 어려움을 발판으로 내 승진에 필요한 은행장 표창장을 구하려고 했다는 나 자신이 싫고 미웠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다고 어르신께 말씀드리고 인근 마트에 가서 쌀과 몇 가지 생필품을 사서 어르신께 드렸다.

담배도 한 보루 샀다.


어리둥절해하시는 어르신께 두 손을 잡고 말씀드렸다.


"어르신요~

인자는(이제는) 아무 걱정하시지 마이소.

은행에서 다시는 이런 일로 어르신 댁을 찾아 올 일은 없을 낍니더.

어르신이 살고 계시는 이 집은 아무도 안건드릴낍니더.

제가 책임질께예."


어르신은 나를 보고 우셨고 나는 차에서 울었다.


그날 지점으로 돌아와서 나는 1분의 망설임 없이 그 연체대출금에 대하여 '대손상각처리' 품의서를 작성하여 본점에 승인을 올렸고 며칠 후 본점에서 승인이 되었다.


대손상각 : 은행에서 대출한 건이 정상적으로 상환이 되지 않아 은행이 상환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였으나 불가항력으로 이를 회수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 그 사유가 부득이하다고 인정이 되면 그 연체대출금을 은행의 손실금으로 처리하는 것


지금도 가끔 그 어르신이 생각이 나고 그럴 때마다 나의 이기심에 송구한 마음이 든다.

지금은 아드님과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마음속으로 말씀드린다.

"어르신~

건강히 잘 계시지예?

그때는 제가 정말 죄송했심니더."


   


 

     

 







작가의 이전글 안성(安城)으로 간 경상도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