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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May 08. 2024

놓아라

만석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갔고 근심의 가짓수도 나날이 늘어갔다.

근심은 밤잠을 설치게 하였고 어떤 때 그 근심은 만석의 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무기력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만석의 근심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머리를 옥죄어 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다.


만석의 조부(祖父)는 본시 가난하였다.

그가 고단한 일에 지쳐 하루를 몸져누우면 그의 가솔들은 하루를 굶었고 그가 이틀을 누우면 가솔들은 이틀을 굶다시피 하였다.

천민으로 태어난 그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는 너무 크고 너무 깊었다.


그에게 가난은 어쩌면 숙명이었고 운명이었다.

운명은 받아들이고 숙명에게는 복종하여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복종하고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태생의 굴레는 그를 가난의 수렁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에게는 바늘하나 꽂을만한 땅조각 하나 없었는데 마을에서 가까운 산을 개간이라도 할라치면 그에게 새경을 주는 주인양반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고을에서도 그를 천민이 면천(免賤)을 위한 일탈을 한다며 잡아서 벌을 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였다.


만석의 조부는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가난이라는 운명, 숙명과 평생을 함께하다가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학질(瘧疾)로 죽었다.


만석의 부친은 어렸을 적부터 늘 가난이라는 굴레를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사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은 절대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지만 그로서도 타고난 천민자식의 굴레는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도 그는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더 늦게 자면서 밭을 매고 논을 갈았다.

아무리 타고난 팔자라고 하여도 스스로 노력하고 헤쳐 나가려는 노력을 하면 언젠가 타고난 팔자가 고쳐진 팔자로 새롭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 믿고 일했다.

일을 하면서도 그는 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입으로 읇조리면서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무게와 믿음이 중(重)해지고 강도가 강해지도록 하늘에 빌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매고 갈고 한 논과 밭은 늘 양반이 주인이었고 자신은 그가 주는 새경에 만족해야 했다.

타고난 팔자의 줄기는 생각보다 굵고도 질겼다.


그럴수록 그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을 더 깊이 가슴에 묻었고 더 간절히 하늘에 기도하였다.


긍정의 힘일까?

기도의 힘일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한줄기 밝은 빛이 머리에 비치더니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변하고 텅 빈 곡간이 쌀로 가득 차고 방안 금고에 황금과 돈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그는 자신이 가난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였다.


새경의 양이 늘어나고 자신 앞으로 되는 등기 땅 하나 없어도 왠지 가난의 늪이 자신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부쩍 콧노래가 자주 그의 코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이 기거(起居)하고 있는 가난한 양반의 눈에 들었는데 그 일이 만석의 아버지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만석의 아버지를 눈여겨보고 있던 가난한 양반이 그를 데릴사위로 들인 것이었다.

양반에게는 얼마간의 토지가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책만 파다가 농사일을 배우지 못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성실하고 부지런한 만석의 아버지를 새경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과년한 딸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늘 남의 논에 모를 심고 남의 밭에 콩을 갈던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다르게 자신이 하는 일 모두가 내 것이라는 생각에 만석의 부친은 샛별을 보고 논에 나가고 달빛을 받아 밭을 갈았다.


그가 움직인 만큼 그의 가산(家産)도 늘어났고 어느새 식솔들 중에는 그가 부리는 사람도 하나, 둘씩 늘었다.


만석의 부친은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중받는지 몸소 느끼면서 살았다.

천민으로 있었을 때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천석꾼이 된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달라진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이래서 돈을 모으려 하고 출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느끼고 실감하였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무(無)에서 어느새 조금씩 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그의 집을 가리켜 천석(千石) 꾼의 집이라 불렀고 스스로도 자신은 천석꾼이라 생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들을 얻었는데 낳자마자 아들의 이름을 만석(萬石)이라 지었다.

자신보다 재산이 열 배나 많은 만석꾼이 되라는 바람에서 그렇게 지었는데 재산이 열 배나 많으면 행복의 지수도 열 배가 될 것이라 믿고 그리 지었다.


만석은 태어날 때 팔자를 잘 타고 태어났다.

그는 조부와 부친과는 달리 천석의 재산을 기본으로 얻어 태어났는 데다가 근면하고 부지런하였던 그의 조부, 부친의 천성까지 그대로 닮아 그는 부지런하였다.


부지런히 일하고 또 일하였다.


한 겨울 어느 날

아침부터 함박눈이 온 동네를 덮을 만큼 내리던 날 그가 마당에 서서 대담배 한대를 피우고 있는데 대여섯 동네 아이들이 동구 밖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에 작은 손으로 눈을 뭉쳐 눈구덩이 위로 굴렸는데 그 눈은 금방 늙은 호박처럼 커지더니 어느새 이이들 키보다 더 크게 뭉쳐졌다.


만석은 그때 이이들이 뭉친 눈덩어리가 꼭 자신의 재산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이 눈덩이처럼 늘어간다는 말이 이 말이구나 싶어 입에 자신도 모르는 웃음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 그 누구도 그의 집을 전에 처럼 천석꾼의 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만석꾼의 집이라 불렀다.

그는 돈을 주고 차함(借銜)의 벼슬도 샀는데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만석꾼나리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었고 달도 차면 기울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그가 만석꾼의 행복에 취해 있던 어느 날

여름의 풀벌레 소리보다 귀뚜라미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가을의 밤이었다.

중천에 떠있는 달이 좋아 대청마루에서 달구경을 하고 있는 만석에게 부리고 있던 머슴하나가 오더니 급하고 비밀스럽게 아뢸 것이 있다며 면담을 요청하였다.


만석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는 이렇게 아뢰었다.

"나으리!

소인과 같은 방에서 먹고 자고 하는 우득(牛得)이라는 친구가 행적이 수상하여 제가 비밀리에 뒤를 캐보니 그 친구가 나리의 논과 밭에서 곡수한 양식을 조금씩 빼돌려서 다른 곳으로 팔아넘기는 것이었습니다.

또 지난달 나리의 축사에서 소가 새끼를 낳다가 죽었다 나리께 고하였는데 실은 그 소가 난산은 하였지만 죽지는 않았사옵니다.

헌데 우득은 나리께 소가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그 소를 다른 곳으로 팔아 자신의 이득을 꽤 하였나이다."


만석이 머슴에게 물었다.

"우득이라는 놈은 오래전 그의 부모가 아이를 소 마구간에 버리고 간 것을 내가 거두어 주면서 소마구간에서 얻었다 하여 우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놈이 아니더냐?

그놈은 자신을 거두어준 나를 친부모와 같이 섬기리라 약속하고 다짐하였던 놈이 아니더냐?"


"그렇사옵니다."

머슴이 머리를 조아린 채 만석의 물음에 답하였다.


"그 아이와 너는 피와 살을 나눈 친 동기간 보다 더 유친(有親)하다 들었다.

헌데 어찌 그 아이의 비리를 이리 나한테 고(告)하는 것이냐?"

만석이 다시 묻자 머슴이 대답하였다.

"예, 나리~

우득이와 소인은 그런 사이이옵니다.

헌데 소인이 그 우득의 도둑질을 눈치채고 이제 그만하라 충고하였는데도 그 친구는 도둑질을 멈추기는커녕 더 크게 나리의 재산에 손을 대었사옵니다."


머슴이 더 낮게 엎드리면서 말하였다.

"소인이 처음 알았을 때 우득은 바늘도둑이었지만 나리께 고(告)하고 있는 지금 우득은 소도둑이 되었습니다.

소인은 절친한 벗과의 우정보다 지금껏 소인을 여느 집 머슴들과 다르게 대해주신 나리에 대한 보은(報恩)이 먼저라 생각되어 이리 벗의 잘못을 나리께 발고(發告)하고 있나이다."


만석은 우득을 불러 그동안의 죄를 묻지 않았다.

대신 머슴을 시켜 그에게 쌀 다섯 가마니와 콩 다섯 가마니를 주고 마을을 떠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늦게 안 우득이 만석의 집을 찾아와 속죄하고 스스로 벌을 청하였으나 만석은 방문도 열지 않고 우득이 있는 마당을 보며 말하였다.

"너의 도적질이 너의 가난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여 나는 너를 벌할 생각은 없다.

허나 도적질은 나쁜 것이고 너의 어려움을 나한테 말도 못 하였을 우리의 인연이 다 된 듯싶구나.

내가 준 쌀과 콩으로 자수성가로 일어나 너의 가솔들을 돌보거라.

내가 준 쌀과 콩이 지금까지 너와 나 인연의 대가이고 네가 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것이 내가 내린 너에 대한 벌이다."

하였다.


그런데 머슴 우득이 마을을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만석에게 전에 없던 근심이 하나둘씩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근심이 만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마음을 옥죄어 왔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머슴과 하인에 대한 의심병이 든 것이었다.


머슴들이 깊은 잠에 빠진 야심한 밤에 몰래 그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가산을 숨겨두었는지 확인하고 또 하인들이 논과 밭에서 추수를 할 때쯤에 또 다른 하인들을 시켜 그들이 곡식을 빼돌리는지 확인케 하였다.

태어나 버림받은 우득을 자식처럼 거두었는데 자신 몰래 곡식과 소를 훔친 것에 대한 충격과 서운함의 결과였지만 만석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병들어 가고 있었다.


만석의 의심병은 한겨울 아이들이 들녘에서 뭉쳐서 던지던 눈뭉치처럼 커져갔고 의심의 대상은 머슴, 하인에게서 자신의 가족들에게까지 번져갔다.

만석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식들이 크게 다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서 이웃나라 오랑캐들이 전쟁이라도 일으켜 금쪽과 같은 자신의 재산을 잃으면 또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의 걱정이 커지고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그는 자신의 방에서 은둔하며 걱정을 키웠고 걱정이 크진 만큼 머슴, 하인들과의 거리도 멀어져 갔다.


몇 달 동안 벗들과의 조우도 없었다.

가끔씩 나갔던 건넛마을 주막에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다음 해 늦 봄

만석의 절친한 벗 하나가 만석을 찾아와 그의 근황을 물었다.

벗의 눈에 들어온 만석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하고 눈이 퀭하여 나흘을 굶은 도둑괭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자네 대체 왜 이런가?
어찌하다 몰골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이 말일세."


만석을 바라보는 벗의 눈에 작게 이슬이 맺혔다.

만석은 방 가장자리 저쪽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벗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닫고 일언반구 대답을 하지 안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만석의 아내가 친구를 따로 불러내어 만석의 모습이 저리 된 사유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벗은 자신의 두 손으로 만석의 손을 마주 잡고 말하였다.

"이보시게 만석이~

내 자네의 속사정을 자네의 부인에게 전해 들었다네.

나는 자네한테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자네가 우리 친구들을 멀리하는 줄 오해하고 그 오해가 진실인양 생각을 하였다네.

진정으로 미안하네.

그나저나 자네 이러다가 정말이지 큰일이 난다네.

내가 자네한테 청이하나 있으니 제발 들어주시게."


벗의 눈빛은 애절하였고 만석의 눈빛은 허공을 맴돌았다.

"자네~

내가 인간사(人間事) 희로애락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그 처방까지 정확히 해 주시는 유명한 스님 한 분을 고 있으니 그 스님을 한번 찾아가 보시게.

우리 마을 저 윗동네 끝에 있는 묘각사(妙覺寺)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그곳의 주지스님이 자네가 지금 안고 있는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 주실지 또 누가 아는가?

스님한테서 자네가 바라는 해답을 듣지 못하면 부처님께라도 속시원히 자네의 속마음을 털어내고 오시게.

그러면 자네의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질 걸세."


"그리고 그 스님은 절대로 한 번에 찾아간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네.

뵙기를 청하는 처음은 단호히 돌아가라 말씀하실 걸세.

돌아서면 안 되네.

그것은 찾아간 사람의 절박함을 보시려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니 내 말 명심하시게."

친구가 당부의 말도 같이 하였다.


사흘 후 만석이 묘각사주 지를 만나러 길을 떠난 것은 친구의 이 말 때문이었다.

"집의 가장인 자네가 이런 몰골로 죽치고 앉아 있으면 자네 부인과 아이들은 또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가 건강해야 자네가 애지중지하는 자네의 재산을 지킬 것이 아닌가?"


만석이 자신의 집을 나서 한 시진(時辰)을 걸어 도착한 묘각사는 친구가 말한 대로 작은 암자였다.

만석이 절 마당으로 들어가 인기척을 하였지만 사람이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청아한 소리로 답을 하였다.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三拜)하고 다시 마당으로 나온 만석이 바라본 마당 밖 텃밭 언저리에 노승이 서 있었다.

'저분이 그제 친구가 말한 그 유명하다는 그분이구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마당에서 텃밭까지는 서른 걸음도 채 되지 않은 지척이었다.

노승은 머리에 삿갓을 쓰고 등에 시주보따리를 메고 있었다.

그 무게를 손에 쥔 휘어진 지팡이가 감당하고 있었다.


근처 마을에 탁발을 하고 이제 막 암자에 도착하신 듯 보였다.


"스님!

제가 근심이 많고 걱정이 많아 요새 통 잠을 이룰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 삶이 재미가 없고 고통스러워 스님께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갈 방도를 여쭙고자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소인은 저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만석이라고 하옵니다."


만석이 노승이 앞으로 다가가 합장하고 말하였다.


노승은 그런 만석을 힐끗이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스님!

저는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야 이놈아

나는 니 따위 중생의 희로애락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니 듣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 여기 텃밮에 있는 잡초를 뽑아야 하니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여기 산사는 해가 일찍 떨어지고 해가 떨어지면 범과 늑대 같은 산짐승들이 돌아다니니 괜히 해(害) 입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노승은 만석의 말을 끊고 돌아선 채로 만석에게 호통쳤다.

그때까지 노승은 만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만석은 친구가 일러준 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서너 번의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호통에도 꼼짝하지 않는 만석을 보고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 저기 잡초를 다 뽑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스님이 처음으로 만석과 눈을 마주쳤다.

만석이 웃으면서 스님께 고개를 숙이자 노승은 자신이 쓰고 있던 삿갓과 지고 있던 보따리,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만석에게 건네며 일이 끝날 때까지 맡아 달라 하였다.


만석이 스님께 그것들을 받아 들고 또 한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무겁지 않았던 보따리가 점점 무겁게 느껴지고 급기야 들고 있는 지팡이조차도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노승이 근처 개울가로 가 손을 씻고 만석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네놈 얼굴이 왜 그리 피곤하게 보여?

뭐 힘든 일이 있어?"


노승의 눈빛이 자신을 호통치던 조금 전보다는 많이 따뜻해 보였다.

"예 스님!

스님께서 조금 전 저에게 맡기신 보따리와 지팡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들고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안색이 곤해 보였나 봅니다."


만석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하였다.

"어허~~

이 놈 이거 아주 웃기는 놈일세.

내가 니놈한테 좀 맡아달라고 하였지 언제 니 놈한테 이 보따리를 들고 있으라 했나?
무거우면 놓으면 되지

이 미련한 놈아."


만석은 스님께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않았다.

'무거우면 놓으면 되지'라는 말 한마디에 크게 깨달은 만석은 스님께 큰 절하고 한걸음에 자신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동안 손에 들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동안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힘에 부쳤다.


놓았다.

그리고 보니 아무도 만석에게 그것들을 들고 있으라 말하지 않았다.

너무나 편안하였다.

달아났던 입맛이 돌아오고 잠이 다시 찾아왔다.


딱 3년이 지난 늦봄에

만석이 다시 묘각사를 찾아 노승을 뵈었다.


'그래 이 놈아

전에 보다는 안색이 좋은 것을 보니 이제는 마음이 편안한가 보구나.

그런데 내가 보기에 아직 니 놈 손에는 무엇인가 들려있어.

완전히 놓지를 못하였구나."


노승의 말에 만석이 흠칫 놀랐다.

실은 노승의 말처럼 만석은 자신의 재산을 조금 더 늘리려는 짐은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속마음까지 다 꿰뚫어 보고 있는 스님께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만석이 아직 자신의 손에서 놓지 못하고 들고 있는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스님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어리석은 놈

삶은 고구마나 먹고 가거라."

하면서 부엌으로 가 솥뚜껑을 열고 이제 막 삶은 고구마를 작대기에 꽂아 만석에게 주었다.


마침 시장기를 느낀 막석이 넙죽 손을 벌려 스님이 주신 고구마를 받았다.

솥에서 막 나온 고구마는 너무나 뜨거웠다.


만석은 고구마가 너무 뜨거워 그만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놈 참~

고구마는 뜨겁다며 금방 놓으면서 네가 아직 들고 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덜 뜨겁구나.

어리석은 놈.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는 것을 쯧쯧 ~~~"


노승은 조금 전 만석이 놓아버린 식은 고구마를 손으로 닦아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만석은 한동안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닫힌 스님이 계신 방에다 전에처럼 큰 절을 하고 절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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