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저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참혹한 전쟁의 소식에 음악에서라도 위로를 찾고자 오늘은 벤자민 브리튼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반전의 메세지를 담아 작곡한 전쟁 레퀴엠을 서가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원래 레퀴엠은 가톨릭의 전례음악이지만 브리튼의 이 레퀴엠은 베르디의 레퀴엠이나 브람스의 독일레퀴엠과 같이 전례용이 아닌 일반 연주회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작곡의 계기가 된 것은 1962년에 과거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의 폭격으로 무너졌던 영국 코벤트리의 성미카엘대성당의 재건립을 축하하는 행사였습니다.
Cathedral Church of Saint Michael
같은 일반 연주용 작품들이지만 베르디의 레퀴엠은 라틴어로 된 전례문에 기초하였고,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와 달리 순전히 독일어로 된 새로운 가사에 따른 것인 반면, 브리튼은 라틴어 전례문과 영어로 된 윌프레드 오웬의 전쟁 시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이 명작을 완성하였습니다.
Wilfred Owen
브리튼은 레퀴엠의 라틴어 전례문은 합창과 소프라노에게 맡기고 오웬의 영문 시는 (메인 오케스트라와 별도로 배치된 소규모 실내악단이 반주하여) 바리톤과 테너가 노래하도록 곡을 구성하였습니다.
작곡 당시 브리튼은 소프라노는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부인인 러시아의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 테너는 자신의 동성 동반자인 영국의 피터 피어스, 바리톤은 독일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데, 이는 전쟁 당사자국의 화합과 화해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연을 앞두고 소련 당국의 불허로 비쉬네프스카야가 초연에 참여하지 못하여 결국 다른 소프라노가 짧은 기간 연습을 거쳐 대타로 기용되어 초연이 이루어졌습니다.
소프라노에게 라틴어 전례문을 노래하게 한 것은 영어를 못하는 비쉬네프스카야를 배려한 조치로 알려져 있는데, 나중에 브리튼은 결국 비쉬네프스카야를 기용하여 데카에서 음반을 출시했었지요.
저는 이 곡을 2019년 3월에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처음 실연으로 접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제법 알려진 I Musici de Montréal의 멤버들까지 가세하여 보강된 10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노련한 솔리스트들, 그리고 어린이 합창단 등 350여명의 지역 합창단원이 La Maison Symphonique 홀의 대형 오르간(Grand Orgue Pierre-Béique)과 합세하여 만들어내는 어마무시한 음향에 완전히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 곡을 음반을 통해 많이 들었지만, 어쿠스틱이 잘 조율된 멋진 대형 콘서트 홀에서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이 일체가 되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도 지극히 섬세한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이전에 들었던 것은 이 곡의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컨대, 이 곡은 아무리 좋은 오디오 시스템라도 음반으로는 결코 실연의 음향과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 곡이기에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브리튼이 작곡시 염두에 두었던 서라운드 사운드의 효과가 풍부한 아래 코벤트리의 대성당은 아니더라도) 좋은 음향의 공연장에서 꼭 실연으로 한 번 들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1. INTROITUS & KYRIE
이 곡은 가톨릭의 전례문에 따라 합창단이 입당송(Introitus)을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불길하면서도 뭔가를 모색하는 음향이 서서히 끓어 오르며 공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시작되는데, 차임벨에 의해 울리는 도-파#의 셋온음(tritone)은 이 전쟁레퀴엠의 핵심을 관통하는 화음입니다. 이 셋온음은 중세에는 악마의 음정이라고 불리웠던 것인데, 이를 죽은 이의 안식을 위한 레퀴엠의 핵심 화음으로 사용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나중에 살펴보듯이 브리튼은 (마치 평화를 갈망하는 소원을 담듯이)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을 포함한 여러 악장의 끝에서 이 셋온음의 부정적 긴장을 F장조로 해소시킵니다.
아무튼 합창단이 영원안 안식과 끊임없는 빛을 갈구하는 노래를 마치자 순진무구한 소년합창단(주로는 연주회장에서 오르간이 위치한 높은 발코니에 위치합니다)이 마치 천상에서 쏟아지는 찬양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BOYS
Te decet hymnus, Deus in Sion:
시온의 하나님, 당신께 찬양을 드립니다
et tibi reddetur votum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당신께 서원을 드립니다
exaudi orationem meam,
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ad te omnis caro veniet.
모든 육체가 당신께 나아갑니다
그 후 다시 합창단이 레퀴엠을 외치며 영원안 안식과 끊임없는 빛에 대한 갈구를 노래합니다.
CHORUS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소서
et lux perpetua luceat eis.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빛을 비춰주소서
합창이 끝나자 갑자기 전쟁에서 죽은 병사를 대표하는 테너가 오웬의 시를 레치타티보와 같이 읊조립니다. 이 때 독립적으로 솔리스트를 반주하는 실내악단은 가사의 내용을 프로그램 음악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매우 위협적이고 마치 절뚝거리는 듯한 리듬에 의한 오케스트라 위로 불리워지는 합창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나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와 같은 원시적 색채를 띄고 있으며, 대포의 폭발음과도 같은 타악기의 울림과 어울려 최후 심판의 날의 이미지를 처참한 전쟁터와 연결시키는 데에 일조를 합니다.
CHORUS
Dies iræ, dies illa,
진노의 날, 바로 그 날
solvet sæclum in favilla,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
Teste David cum Sibylla.
다윗과 시빌라가 예언한 날
Quantus tremor est futurus,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quando judex est venturus,
심판자가 당도하실 그때
cuncta stricte discussurus.
온갖 행실을 엄중히 저울질하리
Tuba mirum spargens sonum
경이로운 나팔소리가
Per sepulcra regionum
만방의 무덤 사이로 울려퍼지며
Coget omnes ante thronum.
모든 이들을 옥좌 앞으로 불러모은다
Mors slopebit et natura
죽음이 실색하고 대자연 또한 그러하리
Cum resurget creatura
모든 피조물이 다시 일어나
Judicanti responsura.
심판에 응답할 때
이처럼 풀 오케스트라와 합창에 의한 디에스 이레 도입부는 어찌보면 베르디의 레퀴엠의 해당 부분이나 말러의 교향곡 '부활'과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바리톤과 테너의 솔로 곡들은 낮선 브리튼의 오페라와 같이 매우 현대적이고 실험적입니다.
바리톤은 (실내악단 및 하프와 함께) 디에스 이레의 상징인 심판의 나팔 소리의 동기를 이어받아 아래와 같이 (역시 오웬의 시에 기초하여) 전장의 나팔수의 비극과 슬픔을 노래합니다.
바리톤의 노래가 끝나자 소프라노가 다시 라틴어로 된 전례문에 따라 최후의 심판책이 펼쳐지는 광경을 엄중하게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울리는 팀파니와 현악기의 반주 위로)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의 합창으로 이어지는데, 그 후 소프라노가 지엄한 왕을 높이 노래할 때 합창은 그 아래에서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같이 노래합니다.
이후 조심스럽게 자비를 바라는 내용의 전례문에 의한 진행은 다시 테너와 바리톤의 이중창에 의해 노래되는 (그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오웬의 시에 의해 중지됩니다. 스네어 드럼 등 타악기가 군대와 무기를 묘사하는 가운데 두 병사가 죽음에 대해 노래하는데, 외적으로 표출되는 자신감과 만용 이면에 매우 불안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집니다.
Great gun towering towaerd Heaven, about to curse;
큰 총을 하늘 나라까지 쌓아 올려, 저주할 준비를 하고
Reach at that arrogance which needs thy harm,
그 해함을 구하는 그 자만에까지 이르고
And beat it down before its sins grow worse;
그것의 죄악이 더 심하게 되기 전에 그것을 물리치라
But when thy spell be cast complete and whole,
하지만 저주가 이미 온전하게 모두 던저졌다면
May God curse thee, and cut thee from our soul!
하나님께서 너를 형벌하시고, 우리의 영혼에게서 잘라내시리라.
표면적으로는 합창단의 회개의 노래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의 무기를 준비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위의 바리톤의 노래가 끝나면 (전례문의 순서를 무시한 채) 다시 합창단이 아래와 같이 디에스 이레를 외칩니다.
CHORUS
Dies iræ, dies illa,
진노의 날, 바로 그 날
solvet sæclum in favilla,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
Teste David cum Sibylla.
다윗과 시빌라가 예언한 날
Quantus tremor est futurus,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quando judex est venturus,
심판자가 당도하실 그때
cuncta stricte discussurus.
온갖 행실을 엄중히 저울질하리
마지막 합창단이 스타카토로 심판의 엄중한 노래를 마무리하자 합창단의 노래 위로 소프라노가 절규하듯 애절히 라크리모사(Lacrymosa)를 노래합니다. 많은 천재 작곡가들의 영감을 자극한 전례문의 내용답게 여기서도 브리튼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언어로 디에스 이레의 마지막 라크리모사를 절묘하게 표현해내었습니다.
Sed signifer sanctus Michael repraesentet eas in lucem sanctam:
인도자 성 미카엘로 하여 저들을 거룩한 빛 속으로 이끌게 하소서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그 옛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셨던 그 빛 속으로
이렇게 합창이 그 가사와 달리 분노에 찬 노래를 외치는 이유는 이어지는 오웬의 시에 의한 솔리스틀의 노래에서 제시됩니다.
시는 전례문에 나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인데, 타악기의 요란한 울림과 함께 테너와 바리톤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제지하며 대신 미리 준비된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마지막에 실내악단의 불안한 반주와 함께 대반전을 가져옵니다. 즉 노인 아브라함은 준비된 양 대신 아들 이삭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유럽의 씨의 절반을 하나씩 다 죽인다고 노래합니다.
이 때 소년 합창단이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와도 같은 오르간의 반주에 따라 봉헌의 찬양 호스티아스(Hostias)를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하고 간헐적으로 바리톤과 테너가 살해의 장면을 강조하며 외칩니다. 죽은 영혼이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하는 전례문의 내용을 노래하는 순수한 소년들의 목소리에는 전장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BOYS
Hostias et preces tibi, Domine laudis offerimus;
희생제물과 기도를 당신께, 주님, 찬미를 드립니다
Tu suscipe pro animabus illis, quarum hodie memoriam facimus:
받아주소서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fac eas, Domine, de morte transire ad vitam.
그들을 옮겨주소서, 주님, 죽음에서 생명으로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일찍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셨듯이
마지막으로 합창이 등장하면서 전례문에서 언급된 아브라함에 대한 신의 언약을 허무하게 다시 노래하면서 봉헌송은 끝을 맺습니다.
곧 신의 어린양은 조용히 읊조리는 합창이 다담하고 전례문이 노래되는 사이사이에 테너가 (위선적인 세태를 고발하는) 오웬의 시를 계속 노래합니다.
CHORU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늘 안식을 주소서
TENOR
Near Golgotha strolls many a priest,
많은 성직자들이 골고다 근처를 거닐며
And in their faces there is pride
그들의 얼굴에는 긍지가 있다
that they were flesh-marked by the Beast
그들이 짐승의 표시를 가지고 있다는 긍지를
By whom the gentle Christ's denied.
자비로우신 그리스도를 부인한 그들
CHORU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늘 안식을 주소서
TENOR
The scribes on all the people shove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문서는 강요하고
and bawl allegiance to the state,
나라에 충성하리라고 외친다.
CHORU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
TENOR
But they who love the greater love
그러나 위대한 사랑을 사랑하는 그들은
Lay down their life; they do not hate.
그들의 목숨을 던지고, 그들은 미워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합창단이 레퀴엠의 전례문(고유문)의 내용에 따라 그들에게(eis) 평화를 달라고 노래하자 죽은 병사를 상징하는 테너가 (전체 곡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틴어 통상문의 내용에 따라) 우리에게(nobis) 평화를 달라고 화답하며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평화가 필요한 것은 죽은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역시 죽은 자들과 다름 없음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5부의 마지막 부분은 (1부 및 2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래 가사의 내용인 안식과는 거리가 먼 도-파#의 셋온음(tritone)이 희망이 묻어 있는 F#장조로 변모되면서 부드럽게 마무리됩니다.
CHORUS
... Dona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늘 안식을 주소서
TENOR
Dona nobis pacem.
우리들에게 평화를 내리소서
VI. LIBERA ME & IN PARADISUM
마지막 제6부는 매우 암울하고 기괴한 오케스트라의 반주 위로 합창단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순서로 리베라메(Libera me)를 노래하면서 시작합니다. 합창은 점점 고양되며 심판의 날을 다시 상기시키는데 마지막 '불로써(per ignem)'라는 단어를 각 성부가 강조하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그러자 소년 합창단이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와 함께 '천국에서(In paradisum)'을 부르기 시작하고 두 솔리스트의 노래와 소년합창단의 노래가 교체되며 노래되는 가운데, 곧 합창단과 소프라노가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함께 같이 가세하면서 곡은 고양되기 시작합니다.
BOYS, then CHORUS, then SOPRANO
In paradisum deducant te Angeli:
천국에서 그대를 천사가 이끌어 주시길
in tuo adventu suscipiant te Martyres,
도착한 당신을 순교자들이 맞아서
et perducant te in civitatem sanctam Jerusalem.
그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주시길
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천사들의 합창이 당신을 맞아주고
et cum Lazaro quondam paupere aeternam habeas requiem.
그래서 한 때 가난했던 나자로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그 후 소년 합창단이 종소리와 함께 이 곡의 처음에 어른 합창단이 불렀던 영원한 안식(Requiem aeternam)을 노래하고 다시 두 솔리스트, 그리고 합창단과 소프라노가 순차적으로 아래와 같이 노래합니다. 이처럼 곡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기악과 성악 파트 모두가 처음으로 마음을 같이 하여 노래합니다.
BOYS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소서, 주님
et lux perpetua luceat eis.
그리고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CHORUS
In paradisum deducant te Angeli:
천국에서 그대를 천사가 이끌어 주시길
in tuo adventu suscipiant te Martyres,
도착한 당신을 순교자들이 맞아서
et perducant te in civitatem sanctam Jerusalem.
그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주시길
SOPRANO
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천사들의 합창이 당신을 맞아주고
et cum Lazaro quondam paupere aeternam habeas requiem.
그래서 한 때 가난했던 나자로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그리고 끝에 합창단이 1부와 2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음형에 의해 Requiescant in pace(그들이 평화롭게 쉬게 하소서)를 노래하는데, 그 때처럼 도-파#의 셋온음(tritone)이 다시 F장조로 조용히 변화하면서 곡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