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의 저주(?)인가?
작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즈음 인덕션이 다이하셨다.
아이들 밥을 해먹여야 했기에 급한대로 인덕션 위에 부르스타를 올려 두고 먹거리를 만들었더랬다.
참 당황스럽고 뜨거운 여름이었다.
지나간 일은 언제나 미화되는 법.
7월 초인가 중순인가, 아이들 방학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작년에 교체한 새(것이던) 인덕션의 더더기 진(?) 겉면을 벅벅 닦아내며
작년의 사건을 떠올렸더랬다.
그땐 그랬지,
인덕션의 저주인가?
여름방학의 저주인가?
밥만 잘 되던 쿠쿠밥솥에 문제가 생겼다.
먼저 내솥이 까져 그걸 교체해야 하는데
신혼때 쓰던 첫번째 밥솥은 5만원이가 주고 내솥을 교체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뭔가 ... 매끄럽지 못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자면
이 더위에 밥하기가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귀찮고 덥고... 이 더운날에도 주방에서 동동거리는 내가 싫었다.
면과 빵은 밥으로 안쳐주는 아들들은
간식을 실컷 먹고도
"엄마 왜 밥 안줘?" 라고 묻곤 했는데 (특히 쌀밥 러버 둘째)
또 어느때에는 실컷 차려둔 밥상을 본체만체 했다.
(그럴 땐 기다리다 밥상을 치우고 나면 울며 불며 밥 타령을 한다.)
쿠쿠에 밥을 왕창 해서 하루 세끼를 먹이면 밥이 딱딱해서 싫다고 운 적도 있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는 새끼들을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눈이오나 비가오나 애들 밥을 해 먹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새끼들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 후 10년 째 계속 아침밥을 먹는 남편
(분명!!! 아침밥 됐다고 했잖아? 마음이나 편하게 해달라며!!!!!!!!!!!!!!)
(뭐, 내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않아 아침밥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심산이라면.... 할말 없음)
................은 아들들 덕분에 아침밥 드시는 거 알고는 계실까.
나의 심술 때문일까.
밥솥은 다이하셨고,
나는 밥솥을 사기 위해 더 카드를 긁을 용기도
밥을 하기 위해 밥솥을 살 기운도
밥에 대한 모든 전의를 잃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밥짓기의 지겨움이나 서럽기는 매한가지...
돈을 버는 자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건만,(물론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겠지만)
돈을 벌지는 않으나 그에 상응하는 노동력을 무상으로 기한없이 제공하는 자는 생색 내기도 쉽지 않다.
맞다. 나는 아무리 밥을 해대도 그것이 당연한 거라 여겨져 생색을 낼 수 없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밥을 하기 싫었던 거다.
아이들에게 밥 먹을 때마다 "잘먹겠습니다"라고 하는 거라고 알려줬건만
남편과 아이들은 그 인사를 너무나 당연하게 잊는다.
'잘먹겠습니다'와 '잘먹었습니다'는 기본 중의 기본... 인데
그 인사(치례)마저 사라진 나의 식탁에서
... 그렇게 나는 밥할 전의를 잃었다.
암튼 그렇게 우리집 주방에서는
밥솥이 자리를 뺐다.
몇 끼는 떡볶이, 만두, 냉동 피자 등등으로 떼우려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밥을 해야 했다.
밥솥은 사라졌지만.
어릴 적 부모님과 캠핑(은 아니고 그때는 야영이었다. 텐트에 코펠 버너 준비 끝)가서 먹은
탄 냄새 가득한 냄비밥의 추억을 뒤로 하고
냄비에 쌀을 담아 씻었다.
벅벅 씻어 센불로 팔팔 끓이다 펄펄 끓기 시작하면 3 정도로 줄여 뚜껑을 좀 덮고 뜸을 들인다.
20분 정도 걸려 따끈하다 못해 뜨거운 쌀밥이 완성되었다.
쌀알의 찰기는 쿠쿠를 따라올 수 없었지만 쿠쿠없이도 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이번 여름방학,
나는 하루 한번만 냄비밥을 한다.
(두번 할 때도 있다)
주로 저녁에 따끈하게 밥을 하고
남은 것은 냉장용기(쿠팡에서 8900원 주고 샀다. 14개나 왔다. 뜨거운 밥을 담으면 환경 호르몬이 나올까 걱정되지만, 하루 세끼 냄비밥 할 자신은 없어 일단 샀다.)
아침은 냄비에 붙은 누릉지를 끓여서 해결하고
(남편이 좋아한다. 오늘은 반복되는 누룽지가 지겨워 양파와 애호박, 참치, 그리고 계란을 풀어 죽으로 만들어줬더니 맛있다고 한 사발 들고 출근하셨다)
점심은 냉장고에 있는 밥을 데워서 해결한다.
둘째가 유치원에 가지 않은 날에는 점심도 새밥을 한다.
매일같이 소세지나 치킨너겟을 에어프라이기에 돌려주다
아주 간만에 간장불고기를 해줬더니
쌍따봉을 올리며 밥을 2그릇씩 먹는 새끼들을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이며 반찬 한 보람이 있다.
그렇게 또 밥을 해 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