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는다니...]
한강 작가의 기사가 포털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요즘.
그녀의 남편 이야기가 나왔다.
안 그래도 수상 소식을 듣게 된 날에 아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거나 아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하겠다고 하던 인터뷰 내용에 '남편이 없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남편이 없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한강을 담을 만한 그릇은 어떤 사람일까 하며 궁금했었다.
이제는 남편이 아니라 전남편이라고 하는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 흘러가 버리고 그녀의 책에 나온다는 남편의 말에 잠자던 나의 감동주머니가 열렸다.
아이를 낳는 것이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그녀에게 여름의 수박과 봄의 참외, 그리고 빗소리와 눈 오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냐며 설득했다는 말에 일상의 대화가 시구였을 것 같은 그가 궁금해졌다.
그의 책을 사서 읽어봐야겠다.
그녀와 이유는 다를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 낳는 것을 '비효율적인 일' 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에게 결혼한 조카가 여럿 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조카는 딩크족이다.
자녀 양육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인데 아이러니하게 그 조카는 아이를 무척 좋아한다.
반면 혼전임신으로 아이를 낳은 조카도 있다.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지만 낙태하지 않고 둘 다 낳았다.
나는 아이를 낳은 조카가 훨씬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카페나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짜증을 냈다.
위험하기도 하고, 제지하지 않는 부모에 대한 반감이 들기도 했던 나의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그러나 밑바닥에 깔린 감정은 그런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을 예뻐하고 귀여워 하지만 순하고 얌전한 아이들에 한정되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엄마나 아내보다는 '나'를 더 중요시하는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다자녀를 낳는 젊은이들을 보면 용기와 소신에 박수를 보낸다.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 작은 계기가 있었다.
운동하다가 다친 어깨를 치료하러 다니는 병원에서 교정치료를 받고 있는데 담당 물리치료사가 하는 말이다.
"원래 애기들처럼 살면 척추 관련 질병이 생길일이 많지 않아요.
인간 본래의 모습이잖아요.
학교에 들어가면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고, 생활습관이 안 좋아지면서 병이 생기는 거죠."
아이들이 맞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아이들 행동과 영상을 유심히 보게 됐다.
내가 힘들게 하는 스쾃도 결국은 앉은 자세에서 바르게 일어나기인데 아기들은 정말 힘들지 않게 일어났다.
말이 통한다면 물어보고 배우고 싶을 정도다.
몸에 힘을 빼야 하는 수영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들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자기도 감당 못하니 저렇게 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인스타그램 팔로우하는 아기엄마는 이번에 넷째를 낳았다.
남동생을 셋이나 둔 큰아이가 좀 힘들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똑똑하고 젊은 엄마가 큰아이에게 마음을 많이 써준다.
그녀의 게시물에 인생 선배라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녀의 소신은 확고하다.
넷을 키울정도면 둘밖에 못 키운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로울 테니 나이 먹은 꼰대는 구경만 한다.
그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홍용희교수의 말처럼 수박의 단맛과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물 그리고 여름의 빗소리 들려주며 함께 있어줄 수는 있다.
한강교수도 아들을 보며 그때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도 아이들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 적도 많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든 게 아니라 그때 들었던 힘들이 나를 살게 했다.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그 긴 터널을 지나는 것이 훨씬 더 많이 힘들었을 거야.'
더 낳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둘이라도 낳았으니 할 일은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