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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Nov 25. 2024

궁금한 그녀 이야기

[순임의 딸]

"칙, 칙, 칙, 칙"


전기 압력솥의 신호추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현미는 쪽방 문을 열고 들어가 수저와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아유, 맨날 쓰는 걸 뭘 그렇게 꽁꽁 숨겨놔. 여기 내놓고 쓰지."


조여사가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사무실에 이런 게 나와 있으면 품위가 떨어지잖아 언니."


현미의 말을 듣고 조여사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소리로 웃었다.


"아이고 송사장 재밌어 하여튼. 그렇지 복덕방도 품위가 있어야지"

"언니 복덕방 아니고 공인중개사라니까."


현미가 여러 번 말을 해도 조여사는 한 번도 공인중개사라고 말한 적이 없다.

마치 그녀가 갖고 있는 단어사전에는 공인중개사라는 단어가 없는 듯하다.

현미는 말을 하면서도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며 분주히 움직인다.

흑미 섞인 밥 냄새가 구수하게 사무소 안을 가득 채웠다.


"언니, 나 밥 먹고 은행 갈 건데 뭐 시킬 거 없어?"


현미는 외출을 할테니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조여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에둘러 말했다.


"찾아 달라고 할 돈이나 좀 있으면 좋겠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는 현미를 보며 조여사가 느린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식사 후 믹스커피 한잔으로 후식을 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밥그릇도 싱크대에 그대로 담가 두고 자리를 정리했다.


'방 보러 나갑니다'


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문에 걸고 작은 손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나서는 현미의 뒷모습을 조여사는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현미는  길 건너에 있는  은행 현금지급기 앞에서 현금을 찾아 대충 가방에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은행 앞 택시 승강장에는 대여섯 대의 빈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미는 맨 앞의 택시 뒷문을 열고 올라 타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00 터미널이요."


뒷좌석에서 보이는 택시 기사의 머리는 정수리까지 벗겨져 반들반들 윤이 났다.

휴~하고 긴 숨을 몰아 쉰 후 현미는 조금 전 은행에서 찾은 현금을 가지런히 모아 지갑에 넣었다.


택시 창문을 조금 내리자 바쁜 세상이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현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이 딱히 머무는 곳 없이 밖을 내다봤다.

00 터미널은 전철로 가도 다섯 정거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택시는 금방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입구에 세워드리면 되죠?"


남자가 정면을 주시하며 현미에게 물었다.


"아, 아니요 기사님. 사거리 지나서 저기 갈색 건물 앞에 내려주세요."


기사는 바깥쪽 차선으로 붙어 교차로를 지난 후 갈색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택시비를 계산한 후 현미는 기사보다 먼저 인사를 하고 내렸다.

현미는 갈색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갈색 대리석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송사장! 자기 어디 갔다 왔어? 이렇게 오래 비워도 돼? 소연엄마가 자기 봤는데 은행 앞에서 택시다고 갔다며? 웬일이래. 자린고비가 택시를 다 타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점심을 함께 먹은 조여사가 순임과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절반쯤 먹던 아이스바가 녹아서 물이 뚝뚝 떨어지자 조여사는 아이스바를 높이 들고 입을 벌려 쭉쭉 빨아 먹었다.


"그 사이에 나를 보고 싶어서 못 참았구나 언니."


현미는 작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고 닫히지 않도록 말굽고리를 발로 내렸다.


"아까 커피를 안 마시고 갔잖아. 호호호."


조여사는 검은 비닐봉지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현미는 종이컵에 커피 믹스를 넣고 재빠르게 더운물을 받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이거 순임형 님이 자기 준다고 갖고 온 거야.

열무김치 맛있게 담갔더라고."


순임은 수줍게 웃으면서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활달한 조여사랑 안 어울릴 것 같은 조용한 성격의 순임은 조여사와 단짝친구다.

남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참견하길 좋아하는 조여사도 순임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현미는 조여사가 말이 많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송사장아, 순임형님이 말이야."


조여사가 말을 꺼내려 하자 순임은 눈짓을 하며 조여사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아유~ 형님 괜찮아. 송사장은 믿어도 돼."


조여사가 쿡쿡 찌르던 순임의 손을 잡아 탁자 위에 올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언제 못 믿는다고 했나. 남사시러워서 그러지."


순임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다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미는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조여사를 쳐다봤다.

조여사와 눈이 마주치자 현미는 표가 나지 않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만히 있으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눈치 빠른 조여사가 순임을 보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형님 편한 대로 해요. 나는 형님이 말을 못 할 거 같아서 그랬지."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현미는 정신을 차린 듯 탁자 위에 놓인 검은 봉지를 열고 열무김치가 담긴 작은 김치통을 꺼냈다.

빨간 고추를 갈아 넣은 열무김치가 적당히 숨이 죽어 맛깔스러워 보였다.

현미는 침샘에서 침이 찍 하고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은 것이 소화가 다 되었는지 위액도 나오는 것 같았다.


"와~ 이거 밥 안 먹고는 못 배기게 생겼는데? 순임할머니 솜씨 엄청 좋으시네. 점심 다시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으며 현미가 말했다.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의 냄새를 맡으니 현미는 조금 전까지 메스꺼웠던 속이 시원해졌다.

현미가 순임 할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순임은 현미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입을 열었다.


"방을 하나 좀 구해야겠는데..."

"네. 말씀하세요."


조금 전의 탠션은 온 데 간데 없이 현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우리 딸이.... 딸 혼자 살 방인데, 이 동네 말고 저 큰길 건너로 좀..."


현미는 하마터면 '딸이 왜요?'라고 물을 뻔했다.

순임에게는 늦게 낳은 외동딸이 있고, 그 딸은 약사 남편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딸이 혼자 살아야 할 방을 구한다는 것은 남편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순임할머니가 주저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기 전에는 절대 묻지 않는 것이 현미가 첫 번째로 꼽는 대인관계 수칙이다.


"아, 길 건너요? 좋은 방으로 찾아볼게요~ 금액은요?"


당신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겠다는 듯 현미는 여느 때 손님을 대하는 말투로 물었다.


"월세로... 우선 월세로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

"네. 월세요. 얼마 정도로 알아볼까요?"


순임은 현미의 물음에 몇 초간 뜸을 들이면서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돈이 별로 없어서...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한 30만 원... 정도 있으려나...."


탁자 밑으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순임을 보며 현미는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있지 왜 없어요. 없어도 내가 만들어야지. 걱정하지 마세요."


현미는 순임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순임의 딸이 살 수 있는 방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이 왜 남편과 따로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역시 송사장이야. 봐바 형님. 송사장한테 말하면 해결된다니까.

언니가 길 건너 동네 부동산 아는데도 없으면서 어떻게 가서 구해.

송사장이 찾아줄 거야. 걱정 말고 다리 뻗고 자도 돼"


조여사가 순임을 데리고 돌아간 뒤 현미는 부동산 중개업소의 사이트를 뒤지며 부지런히 방을 찾았다.

매물로 올라온 사진도 눈여겨보았다. 자신도 매물을 올릴 때 가능하면 좋은 부분만 찍어서 올리기에 대부분의 사진이 백 퍼센트 솔직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사진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집 상태를 가늠할 수는 있다.

그중 상태가 양호한 물건 서너 개를 선택해서 물건을 올린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행운부동산이에요. 여기 매물 올리신 거요. 제가 미리 좀 볼 수 있나요?"


현미는 사진만 보고 갔다가 순임이 혹시 실망스러워할까 봐 수고스러워도 본인이 먼저 체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현미가 선택한 물건 중 세 군데 정도가 양호했다. 다만 금액이 좀 차이가 났지만 공실이라면 집주인과 조정해 볼 여지가 있었다. 조정이 안되어도 물건만 마음에 들면 대부분 지출을 늘려 계약을 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방을 보고 돌아와 땀이 채 식기도 전에 현미는 조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순임할머니 딸 방 있잖아. 내가 몇 개 찾아 놨거든. 시간 되시면 나오시라고 해줘요."


전화를 끊고 나서 유리컵을 들고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받아 들이키고 나니 휴~ 하고 한숨이 나왔다.

언제부턴가 현미는 한숨을 쉬는 버릇이 생겼다. 자신은 느끼지 못했으나 습관처럼 한숨이 나왔다.


순임은 세 개의 물건을 모두 보는 동안 별 말이 없었다. 기껏해야 주방에 있는 수도를 틀어보고 화장실을 유심히 살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그녀 모습은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채광이 잘 드는 2층 원룸을 보며 순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방은 현미가 볼 때도 흡족했으므로 계약을 하도록 유도했다.


"순임 할머니도 보시는 눈이 보통은 넘네요. 여긴 리모델링을 해서 여자가 살기는 딱이죠. 그리고 집은 원래 첫 느낌이 좋은 집을 계약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 집은 살면서도 기분이 좋아요."


순임은 2층 원룸 남향집으로 계약을 했다. 딸이 안 봐도 되겠냐고 물으니 조용히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동중개를 하는 중개업소에서 혹시라도 사생활에 대해 물어볼까 봐 조금 염려는 되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빈집이라 언제든 입주할 수 있었지만 현미는 이사 날짜를 여유 있게 잡아놓고 협의하는 걸로 계약서에 명시해 달라고 했다.

현미는 중개 수수료를 받는 게 본업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수수료를 안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애써 그런 마음을 지우려 한다. 공과 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도 이런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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