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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간 곳은 편안하니

by 한걸음씩

영순이 떠난 지 열흘이 넘었다.

영순의 죽음은 순식간에 나의 우울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울었다.

자다가 깨도 눈물이 났고, 영순이라는 이름만 입에 올려도 눈에서 열이 났다.

아버지의 임종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몇 달 전.

영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앞뒤 문맥도 맞지 않는 말로 횡설수설했다.

약간 산만하긴 했지만 그날은 특히 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순은 나에게 대뜸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자면 안 돼?'라고 물었다.

금요일이라면 생각 좀 해 보겠지만 그날은 주중이었고, 더구나 근무 중에 받은 전화라 거절했다.

준비도 없이 출근했는데 외박이라니.


영순은 그 구조신호를 시작으로 마음의 병이 몸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각별하게 지냈던 용미를 통해 들은 영순의 근황은 누가 봐도 심각하게 여길만 했다.

그날 집에 와 달라는 전화를 거절한 것이 후회되고 미안했다.

이제라도 찾아가 만나 보고자 했으나 영순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좀 안 좋아서... 나중에...'


여러 번 전화했으나 항상 같은 문자로 답했다.

영순은 친구와 만나는 중에 정신을 놓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용미는 영순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나에게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오히려 치료에 방해가 될 거라면서.


영순을 자주 만난 용미는 영순의 마음을 갉아먹은 것은 결국 욕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과연 그럴까.

욕심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는 있겠으나 스스로 우울하게 할 수 있을까.


영순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죽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실패하게 될까 봐라고.

마지막 sign인데 그걸 놓쳤다.

정말 죽고자 하는 사람은 실패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부고를 듣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하루만, 단 하루만 되돌릴 수 있다면...

자살에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재시도를 하다고는 하지만, 영순은 아닐 것 같았다.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루이틀 사이에 생긴 우울이 아닐 것이다.

결혼 전부터 큰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깊숙하게 감춰두고 살았다.

사고를 아는 친구가 몇 안되었기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 등록도 하기 싫어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결혼하고 출산했다.

어쩌면 오래 묵은 상처들이 되살아 나고,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뒤엉켜 영순의 어깨를 눌렀을지 모르겠다.

함께 했던 친구라고 말하기도 수치스럽다.

어쩌면 이렇게 친구를 몰랐을까.

며칠 동안 무기력하고 힘들었다.

기운을 차린 것은 영순과 함께 여행할 때 동행했던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다.

그 친구도 나만큼 영순의 작별을 힘들어했다.

남은 자들끼리 영순을 애도했다.


장례는 조촐했다.

치매 엄마를 치료하는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금 어떠실까.

갑자기 증발한 딸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영순은 떠났지만

아무도 영순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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