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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야 May 31. 2022

35. 당근 라페 실패... 아니 소생기

소금은 너무 어려워

 당근은 강인하다. 5월 첫 날 쏨땀을 만들고 남은 채 썬 당근이 한 달 가까이 살아있었다. 요새 집에서 일주일에 한 끼조차도 먹기 쉽지 않아 냉장고에만 방치되어 있다가, 야근 한 고비, 가족 행사 한 고비를 어찌저찌 버텨내고 난 뒤에나 숨을 좀 돌려 냉장고 속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사실, 3주 넘게 방치된 락앤락을 열면서 곰팡이가 펴 있을까봐 걱정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이 기특한 당근은 사각사각 잘 살아있어 줘서 시 채 써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락앤락에 물기는 어렸지만 나름 멀쩡했다!


 이 당근으로 무얼 할까.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러시아식 당근 김치를 만들려고 마음만 먹고 있다가, 문득 외근 나간 곳에서 혼밥을 했다가 들른 세계재료(?) 마트 같은 데에서 우연히 홀그레인 머스타드를 마주치고는 당근 라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번에 당근김치를 만들 때 이름이 라페인 줄 알았다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라페는 머스타드가 필요해서 포기했었기 때문이다(사실 냉장고에 머스타드가 있었지만 유통기한이 2017년인가 까지길래 미련 없이 버려버렸었다). 유리병이 무거웠지만 자취방까지 열심히 짊어지고 와서는, 친구들과의 피크닉을 위해 당근라페 샌드위치를 하겠다며 빵까지 챙겼지만 결국 야근에 절어 포기하고 방치하다 드디어 냉장고에서 꺼내 보았다.


 레시피는 쉬워 보였다. 당근을 소금에 절여서 물기를 빼고, 식초, 설탕, 머스타드 등등을 섞은 소스에 버무려 하루 정도 두고 먹으면 된다고 했다. 소금을 뿌리고 30분 방치해보려다가, 물기 그냥 빼지 말지 뭐- 하면서 소스까지 버무려놓고 냉장고에 다시 넣었다. 주말까지 기다리면 뭐라도 되겠지? 하고 평일 밤에 나름대로 요리(?)를 한 나에게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그럴 듯해 보였는데!

 그렇게 방치한지 약 3일 반이 지나고, 사전투표를 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회사를 나온 김에 집에서 밥을 챙겨 먹어보겠다 부지런을 떨어봤다. 계란후라이를 두 개 플렉스해보고, 최소 일주일은 넘은 듯한 삶은 감자를 데우고. 데코용으로 고수를 좀 잘라 넣으려다가 화분의 상태를 보고 경악해버렸다. 전날 밤 자기 전에 조금 시들한가...? 했더니 우리 귀여운 고수들이 진디의 공격으로 무너져 있었다. 사진은 혐짤일 것 같아서 굳이 찍진 않았지만,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세 포기 정도를 다 잘라서 버리고 나머지 세 주 정도에 있는 진디들을 손으로 다 죽이고 급한 대로 얼마 남지 않은 비오킬을 뿌려놨다. 식욕이 다 죽었지만 이미 부친 계란은 먹어야겠다 싶어 감자를 다시 데우고 반찬 삼아 라페를 꺼내 봤다.

전혀 꺾이질 않는 강인한 당근 칭구..

 아삭, 아그작. ....? 내가 상상한 식감은 이게 아닌데. 그리고 이건 너무... 너무 당근 맛인데! 절인 시간이 부족했나 싶었지만 3일이면 하루보다 출분히 길었다. 머리에 스쳐가는 기억. 소금을 넣을 때, 언니가 새로 산 자동 그라인더를 자랑하며 이 정도면 대충 반 스푼 정도 된다고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동 그라인더가 생각보다 너무 고와서(?) 양이 얼마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단 뜬 당근.... 생 당근무침(?)은 먹었지만, 이대로 더 둘 수는 없어서 다시 소금을 골고루 뿌려 놓고 냉장고에 넣었다. 내가 당근 라페를 먹어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 맛은 아닐 거다. 퇴근한 언니한테 말해 보니, 자동 그라인더에는 히말라야 핑크 솔트가 들어 있는데, 그게 일반 소금보다 더 맛이 약하기도 하다고. 어쨌든 핑계댈만한 원인을 찾아 힘을 내서 다시 방치를 시작했다.

사진은 별 다를 게 없지만 다행히 맛이 변했다.

 그렇게 다시 꼬박 4일을 방치하고, 오늘 글을 쓰면서 다시 꺼내어 맛을 봤다. 이건.... 이건 생 당근이 아닌 절여진 당근이다! 간도 그럭저럭 뭔가 있다! 그래서 급하게 글 제목을 '당근라페 실패기'에서 '소생기'로 바꿨다. 밤이라 더 먹어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먹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비록 다음에는 당근을 한 번 더 채썰게 된다면 당근 라페가 아닌 당근김치를 할 것 같지만. 아, 이렇게 되면 또 홀그레인 머스타드는 5년간 방치되어 버려지게 되려나? 뭔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아 보긴 해야겠다. 재료의 세계는 아직 초보 자취러에게 너무 넓은 것 같다. 그래도 당근 라페는 살려서 다행이지만!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샌드위치를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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