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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디 Apr 03. 2022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듣고 또 들려주고 싶어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잘 듣고 있어요 - 이랑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kJ5lmkbGQdg

이랑 - 잘 듣고있어요 (3집 음원)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아 내가 정체되어 있구나! 생각이 굳어있구나! 싶을 때 혼자 여행을 하고, 평소에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해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 오늘은 우연히 서울 용산을 여행했습니다. 나이, 직업, 성격, 성별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됐거든요!

등대사진관의 습판사진들 _220402

'습판 사진'을 아시나요? 19세기 영국에서 발명된 사진 기술인데, 철판 위에 은으로 된 감광제를 바르고 몇 초만에 상을 남겨서 사진을 찍는 방법입니다. 철판에 상이 남아서, 수백 년 동안 보존이 가능해요. 19세기 근대 발명품이라, 보존기간이 1,000년인지 한계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등대사진관 (이런 쇼윈도를 발견하면 좋아서 방방 뛰는 편)

백 년 전 사진 기술로 사진을 찍는 사진관이 서울에 있습니다. 오늘은 사실 박하 작가님이랑 스냅을 찍기로 하고, 용산을 철길을 걸어 다니다, 카메라가 너무 신기해서 기웃기웃거렸거든요. 신기한 거 보면 방방 뛰는 타입이라, 쇼윈도 앞에서 방방 뛰었더니 사진관 작가님이 들어오라고 하셔서 들어갔어요!


등대사진관의 옛날 카메라

  8월의 크리스마스 (1998)에서 본 그! 큰 카메라를 실제로 보니까 너무 설렜어요. 직접 상 맺히는 것도 보고, 옛날 사진기 원리도 알게 됐습니다. 습판 사진이 궁금해서 질문을 막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분이,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하고 들어오셨어요. 몇 년 전부터 등대 사진관 건물만 찍으셨던 사진 작가님이셨는데, 사람들이 안에 있는걸 처음 봐서 용기내서 들어오셨다고 해요.


 등대사진관 운영하시는 규열 작가님께서, 보이차를 내어주셔서 넷이 앉아 30분 얘기한다는 게 3시간 동안 얘기했습니다. 카메라로 시작해서 각자 살아온 얘기, 예술에 대한 이야기, 여행, 좋아하는 음식, 잘하는 일, 직업관 이런 얘기들을 했어요. 습판 사진 원리도 완벽하게 알게 됐답니다!

종범 작가님이 차에서 가져오신 카메라들 (EXA-1a가 너무 멋졌다)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종범 작가님은 아! 차에 잠깐 갔다 올게요! 하시고는 차에 있는 카메라들을 가져오셨어요. 상이 위로 맺히는 카메라, 디지털은 700만 원대인 LEIKA 필름 카메라도 보고, 캐논 자동 필름 카메라도 구경했습니다.

볕이 드는 등대 사진관

  제가 얼마나 운이 좋냐면요, 등대 사진관은 암실 작업 때문에 평소에 가림막을 쳐놓는다고 해요. 규열 작가님이 오늘도 가림막을 쳐놓으셨다가 날이 너무 좋아서 걷어냈는데, 제가 방방 뛰고 있었다는 거예요. 손님  누군가에게 들어와 보라고 한건 오랜만인데, 종범 작가님도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오늘은 무슨 날인가 보다! 하셨다고 해요. 넷이 분명 오늘 처음 봤는데 즐거운 대화를 하고, 제가 최근 깊게 생각하던 부분들도 대화하면서 해소가 되었어요. 작가님이 "이런  우연이라고 하는데, 우연도  정해져 있는  알고 있죠?" 하신  계속 기억나네요.





달팽이 머리 위의 두 개의 작은 뿔, 와각지쟁 (蝸角之爭)


  몇 달 동안 제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제입니다. 달팽이들이 머리 위의 두 개의 뿔로 싸운다는 뜻의 와각지쟁. 누가 보더라도 하찮고 의미 없는 싸움질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별거 아닌 일로 진흙탕 싸움을 하지만, 실제로는 본질은 상관이 없고 소모전인 경우가 많잖아요. 저와 제 주변 20대들의 삶이, 이런 와각지쟁의 상태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20학번을 만나보신 적 있나요? 코로나로 MT 한번 가본 적 없고, 경제난과 실업률 뉴스를 보며 성인이 된 학번입니다. 스무 살이 된 순간부터 토익 학원에 등록하고, 3학년 전에 자격증 3개 이상을 취득합니다. 인턴을 위해서요. 후배에게 좀 쉬어도 돼! 휴학하고 놀아! 했더니 언니, 취업 힘들잖아요. 저 내년에 4학년이에요. 우리 학교가 서성한도 아니잖아요.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후배의 얼굴은 너무 어려서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찾아 읽었어요. 13년에 나온 책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대학생들, 대학 서열화, 야구잠바 문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08학번부터 12학번의 이야기지만, 취업상황은 악화되었고 대학은 바뀌지 않았어요.


  지연이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강대와 같은 이니셜인 'S'로 시작하는 학교 야구잠바를 입은 사람을 보면 슬쩍 그 뒤로 가서 어느 학교인지 확인한다. 이때, 그 S가 서울대면 지연이는 왠지 주눅이 들고 숙명여대, 상명대, 서경대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세대'라고 써진 책과 노트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지연이는 어떻게든 그 학과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려고 눈을 번뜩인다. 만약 무슨 인문계열이면 지연이는 피식 비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점수 맞춰서 학교 타이틀 보고 지원한 주제에.. 그랬으면 나도 연대 다녔다.'라고. 사실, 지연이게 내게 늘 강조하는 말은 "제가요, 연세대 낮은 학과에는 충분히 갈 수 있었어요. 그래도 요즘 세상에 학교 이름만 보고 가는 건 웃기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서강대 경영학과에 온 거예요."였다. 이쯤이면 지연이가 그렇게 수능시험을 망쳤다고 말하고 다니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서강대 지연이는 상대방의 대학에 따라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넘나 듭니다. 그 넘나듦의 기준에는 '수능점수'라는 성과가 있죠. '수능점수'에 근거한 대학 서열에 따라 자신은 '서강대 경영'이고 쟤는 '상명대 경영'이니 우월감을 느낍니다. 이런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껴보지 않은 대학생이 있을까요?


 '수능점수'를 따라 들어간 대학은 노력한 만큼 얻어낸 성과입니다. 이 결과에 책임질 사람은 그 자신뿐이죠. 설사 '대학 이름' 때문에 무시받거나 차별받는다 해도 누굴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숙국숭세단.. 약 20여개 대학의 서열표에 따라 받은 차별에 고통을 느꼈대도, 공감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만난 주위 20대들은 이 '원칙'을 부정하지 않아요. 수능점수라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실력이 평가되었고, 이는 공정하니까요. 하지만 이게 거의 신념 수준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평소에 공부를 안 했으니까 그 모양이지!"

  "성0대? 신0대? 그런 대학도 있냐? 그런 대학 다니는 애들은 노답이지!"

  "지방대 다니는 A가 대기업 가려고 노력하니까 기특하더라고."

  "숭실대보다 경희대 강의 수준이 더 높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취업이 더 잘 되는 것도 당연한 거지."


 책에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무심코 들을 수 있는 말들이지만 여기에는 대학 서열에 따른 무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어떤 경험을 했기에 대학 서열로 사람을 뚝뚝 판단하나요? 대학 서열이 문제적인 이유는, 사람의 잣대와 됨됨이를 '수능점수'만으로 줄을 세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능 점수가 높은 모든 사람이 멋지고, 친절하고, 상냥하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학습 역량은 인간의 극히 일부분이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할 역량은 무한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이십 대들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 이름으로 상처 주고 상처받습니다. 얼마 전 후배가 했던 말, '서성한이 아니라 숭실대라, 언니 저는 쉴 겨를이 없어요.' 이 말이 슬펐던 이유겠죠.



  '수능점수'라는 명명백백한 기준으로 대학이 결정되고,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수능점수'를 얻기 위한 출발선은 모두 같았나요? 모두가 같은 고등학교 시설과, 사교육 수준을 누리고, 개인 과외를 받고, 입시 컨설턴트를 고용하고, 무제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나요? 저는 서울의 한 사립고를 나왔고, 아이패드를 써서 공부했던 친구들과 그렇지 못했던 친구들을 기억합니다. 컴퓨터실 문이 잠기면, 인강을 듣지 못했던 친구들을 기억해요.


 취업 준비생이 되니 차별과 판단의 범위는 더 넓어집니다. 대학 이름이 아닌 기업 이름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신념 수준이 되어버린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더 슬퍼져요. '수능점수'가 '자기 계발, 자격증, 스펙'으로 대체되어 이름도 모르는 중소에 취업한 친구와 연락하기 껄끄럽다, 노력을 왜 더 안 하는지 모르겠다, 걔는 욕심도 없고 편하게 살아서 좋겠다, 하면 대화 주제를 빠르게 바꿔버립니다. 빚 때문에 어디든 무조건 취업해야 했던 친구들이 제 주변엔 있고, 지금 취업준비를 할 수 있는 너의 상황이 누군가에겐 평생 없다는 걸 기억해, 하는 말은 듣는 이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김애란 작가의 <베타 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아영이는 재수로 서울 사립대학에 들어가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토익도 900점이 넘는다. 그러나 취업에서 서른 번째 낙방을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혹시 나는 정말 괴물이 아닐까?" 하지만 아영이는 "자기소개서 모범답안은 '잘' 쓰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쓰여 있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사회는 그러한 인생을 스펙이라 말한다. 물론 이것을 잘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돈은 또 어떻게 벌어야 하는가? 아영이는 등록금도 벅차다. 대학 생활 내내 보습학원에서 일하며 치사하기 짝이 없는 대우를 받아도 버텨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한다. "대체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 이런 아영이에게 '누구나 힘든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맞다. 누구나 힘들다. 그런데 누군가는 '더' 힘들다. 사회는 그 힘듦의 불공정한 '차이'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회의 불균등'에 대해 사회가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때, 당사자들은 좌절에 빠진다.

  겉으로는 동일한 출발선으로 보여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자 가진 기회는 균등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탈락이 계속되니 저를 스펙화해서 돌아보게 되요. 내 대학은 서울에 있지만, 다른 대학에 밀리니 좋은 대학원에 가야 하나? 토익 900이 넘지만 990에는 가깝지 않으니, 가깝게 만들어야 하나? 자격증을 더 따야 하나? 싶다가도,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싶어요. 제가 하는 선택이 쓸모없고, 무의미한 경쟁을 부추긴다는 느낌이 계속 따라옵니다. 누군가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자금 대출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참여할 수도 없는 경쟁을요.


등대 사진관, 현상실



'네가 대학에 떨어진 이유는 올해 카시오페이아좌에 있는 7789 베타 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기 때문이란다'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중에서


요즘 취업상황을 보면, 이 문장만 떠오릅니다. 네가 1차 서류에서 떨어진 이유는, 7789 베타 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반짝거렸기 때문이란다! 정말 사소하고 동떨어진 원인이 결과에 영향을 주고, 운에 따라 서합이 달라져요. 이런 시기에 나는 친구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나 자신은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미팅 한 번 못해보고, 교환학생 한 번 꿈꿔보지도 못하고 인턴 자소서를 봐달라는 20학번 후배를 어떻게 위로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1LEZk3nCKQ

  이랑의 '잘 듣고 있어요' 라이브 영상을 보면서, 무심코 달린 유튜브 댓글들을 다 읽고 아 이게 좋은 선택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오늘 등대 사진관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며 확신도 들었고요. 잘들어주는 것, 잘 듣고 있다고 말해주고 의미가 있는 이야기들은 기억하고 나눠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요. 미용사를 하다가 손이 아파서 사진을 공부한다는 박하 작가님, 사진과를 나왔지만 돈이 안돼서 트럭커로 일한다는 종범 작가님, 매거진업계에서 유명하고 20년을 일했지만 세월이 흘러도 가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 빚을 내서 스튜디오를 시작했다는 규열 작가님의 얘기를 잘 들었어요. 잘 듣고, 기억하고, 브런치에 쓰면서 이렇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고 조그만 제가 바꿀 수 없는 인식이나, 거대한 편견들을 고민할 때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너 하나가 그런다고 뭐가 바뀌는데?' 하는 말을 들어요. 하지만! 저는 고민하고 생각하면, 딱 그만큼 행동하고 변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 하나 늘어나면, 적어도 스물셋 대학생이 취업 걱정 없이 쉬어도 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너만 힘든 거 아니니까 약하게 굴지 마! 해내야지! 더 노력을 해야지! 노오력이 부족하네! 하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아요.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지금 얼마를 버는지, 어디에 사는지 내 세계의 기준에 따라 싹둑싹둑 사람을 재단하고 싶지 않아요. 싹둑싹둑 마음대로 잘라버리면, 언젠가 싹둑싹둑 잘리는 순간이 올 텐데 그런 세상보다는 잘 듣고, 좋은 대화를 하고 싶어요. 오늘 했던 용산 여행처럼요! 만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의미 있는 이야기는 나누면서 살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x7-mBCUFnk  

예술가 '이랑'은 노래도 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립니다. 제가 아는 인디가수 중, 가장 솔직하고 아픈 부분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가수예요. '늑대가 나타났다'는 도입부가 너무 새로워서 진입장벽이 있지만, 듣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는 노래입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주세요! 하는 부분이 계속 남는 노래예요.


여유가 된다면, 꼭 들어주세요. 그리고 습판 사진이 궁금하시다면, 큰 옛날 카메라를 눈으로 보고싶다면 등대 사진관에 저랑 같이가요! :)


2022.04.02 종범 작가님이 알려주신 연남동 사진기 가게에서

그리고 오늘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계절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답니다. (모임명 : EXA-1a)

TMI 지만 자랑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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