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디 Apr 19. 2022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배진우의 시, <아침만 남겨주고 - 김현창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ciDT-csnX20


  어떻게 매사에 그렇게 긍정적이야? 어떻게 볼 때마다 사람이 웃고 있지?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현실적 긍정주의자를 지향하고, 오늘 내 기분은 오직 나만 결정할 수 있어! 가 기본 설정인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보면 무슨 일이 있던 그래도 오늘은 행복한 하루~ 로 끝납니다. 빨간 대저토마토는 소금을 안 뿌려도 짠맛이 나는데 모차렐라 치즈랑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행복한 하루~! 인턴 친구들이랑 다 같이 벚꽃 구경을 했다. 벚꽃이 폈는데 돈도 버는 나 너무 멋져! 오늘도 행복한 하루~! 하는 식입니다.


  이런 성격과 마인드 셋으로 살다보면 장점이 꽤나 많습니다. 제일 좋은 건 주변에 웃는 일이 많아진다는 거예요. 불평불만보다는 잘 듣고, 유머로 받아치고, 부정적인 건 득달 같이 아니야~! 오히려 좋아~! 해버리니까요. 또, 쉽게 패닉이 오거나 불안을 느끼지도 않아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 망했다! 할만한 일에도 아니야~ 망하지 않았어 다시 하면 되지! 더 열심히 하면 되지! 해버립니다.


  단점은, 평소 솔직한 나의 상태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속고 속이는 세상.. 내 상태를 내가 속입니다. 일기도 쓰고 항상 웃고 다니다 보면, 정말 힘든 제 상태를 모를 때가 많아요. 오히려 주변에서 오늘 피곤해? 하며 먼저 알아차려 주는데, 아 내가 지금 힘든 상태구나! 를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가고 싶었던 기업에, 꿈만 꾸던 직무로 다음 전형에 도전할 수 있게 됐는데 (축하해 민지~) 기쁜 감정보다 무기력한 감정이 먼저 오는거에요. 새벽까지 준비하다가 갑자기 울기도 해서 아 나 지금 힘들다! 하게 됐습니다.


  힘든 상태를 인지하고 나면, 제 든든한 친구인 과거의 제가 남겨놓은 일기를 읽습니다. 오늘은 탱자탱자 놀러만 다니던 스무살 일기를 읽었는데 당시 너무 좋아했던 배진우 시인의 시를 발견했어요. 지금 상태에 딱 좋은 시라서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배진우

어제 벽에 붙어 있던 거미가 오늘도 그대로 있다.
자신이 거미가 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제는 만났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너에게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에 실패한다

구석이 점점 어두워져도 거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거미가 되기 전의 삶을 떠올려 보는 것일까
그와 삶을 바꿔치기 한 무엇은 먼지 자욱한 실내에 엉거주춤 서 있을까
한 번을 바뀌지 않아도 적응하기 힘든 몸

네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고 알코올이 되는 상상을 한다
오늘 자전거를 끌고 천변을 지나간 사람이 내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내내 우리의 뒤로 늘어뜨려지고
잠시 뒤처진 사람의 발이 앞서간 사람의 것에 걸린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사라지기 전 다른 바람이 와서 그것을 지우듯이

어제 벽에 붙어있던 거미가 오늘은 안 보인다
그런 믿음을 갖는다
너의 그때가 나에겐 지금
나방이 움직이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죽음을 예상하고 수많은 지금이 걸어온다.


저는 이렇게 읽고 나면 의미가 없으면서도 알 것 같은 시를 좋아합니다. 황인찬, 배진우 시인을 좋아해요. 처음 읽고 난 뒤 눈에 띄는 행은 어떻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입니다. 당시 홍상수 감독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재미있게 봤어서 이 시를 어디 문예지에서 보고, 옮겨 적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

잠시 뒤처진 사람의 발이 앞서간 사람의 것에 걸린다 /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사라지기 전 다른 바람이 와서 그것을 지우듯이 /


하지만 마지막 연, 5행이 지금 상태에 위로가 됐습니다.


어제 벽에 붙어있던 거미가 오늘은 안 보인다
그런 믿음을 갖는다
너의 그때가 나에겐 지금
나방이 움직이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제 벽에 붙어있던 거미가 오늘은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 믿음을 갖는 거죠.


마지막 행인

죽음을 예상하고 수많은 지금이 걸어온다


는 처음 읽었던 때에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몇 해가 지나고 나니 제일 크게 보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수많은 지금이 걸어오고 있으니, 힘든 상태나 감정들을 잘 갈무리해서 후회 없는 오늘을 완성하자! 수많은 지금으로 이뤄질 내일, 내 상태를 알았으니 맛있는 거 먹이고 잘 회복하자!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KpMraP0oYE

 그리고 너무 좋은! 인디 뮤지션을 한 명 발견했어요 :)

<아침만 남겨주고> 가사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전곡을  듣다가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뮤지션 김현승은  97년생으로, 앨범은 3개가 있어요! 허수경 작가의 책을  읽을 정도로 좋아하고 인스타를 보니 개인 공연도 작게 하고 있네요. 오늘 오후에는 <00>, 그리고 지금은 <아침만 남겨주고>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                                           


<아침만 남겨주고>를 들으면서 이렇게 따뜻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구나! 했습니다. 영화 <As Good As It Gets>에서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만큼 근사해요. 가라앉는 마음을 대신 울어주고, 볕이 드는 아침만 남겨주고 싶다는데 오늘 저한테 꼭 필요한 노래네요 :)


주말에 꼭 여유를 내서 허수경 작가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김현창 유명해져라!!!!


매거진의 이전글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듣고 또 들려주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