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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희 Jun 13. 2024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독서모임에 등록하며 쓴 첫글

<나는 왜 써왔으며 쓸 것인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이라니. ‘1984’와 ‘동물농장’. 책을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책의 저자인 조지 오웰이 자신이 왜 글을 써 왔을지 밝힌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위대한 작가라고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 다르려나,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던 것 같다. 두께감이 제법 있는 책이다 보니 그가 왜 쓰는지가 빽빽이 적혔나 했지만, 본 책은 오웰의 에세이 중 역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29편을 묶어내 시간순으로 정렬한 ‘에세이집'이었고 동명의 제목의 에세이는 단일한 에세이 한 편이었다. 그것도 그런대로 좋았다. 나는 초반부 에세이 몇 편과 눈에 밟히는 제목의 에세이들을 읽어보았다. 각 에세이의 첫 페이지의 각주로 해당 작성 시기 전후의 상황을 적어주어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몰입하니 그의 생을 탐독하고 있다는 감각을 넘어서 그와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식민지 문제 등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목 높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수의 에세이에서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묘사하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적었는데,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해박하지 못해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책을 읽을 법한 사람들에게 전하려 하던 메시지였기에, 와닿기까지는 그 시대에 대한 밀도 높은 이해를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정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작가이기에 그러한 글들이 핵이겠지만, 시대를 공부하고 난 뒤 읽어야 더 읽힐 글이라 아쉽게도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룬 에세이는 제외해 읽었다.

에세이들을 읽기 전에는 워낙 유명한 작가다 보니 조용한 곳에서 고고하게 글을 썼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에세이를 읽으며 그런 편견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놀랍게도 그는 어릴 적 심란한 마음에 오줌을 싸기도 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한 식민지의 경찰로 재직 중 사형집행을 돕거나 코끼리를 죽였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있었기도 했고, 걸인들과 함께 부랑자 임시 숙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기도 한 굴곡진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그러한 경험 속에서 어떤 것을 관찰하고 느꼈는지를 살펴보며 나는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조지 오웰’이라는 사람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글을 읽으며 오웰이 익숙하게 글로써 자신을 정돈해왔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삶이 퍽퍽하고 바쁘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기 보다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쁘다고 힐난하려는 거라기보단, 단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웰은 가난과 전쟁이라는 여유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어떠한 주제로 어떤 이유로 글을 쓰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뭐가 됐든 살면서 ‘글을 쓴다는 행위’는 누구에게나 퍽 부자연스러운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웬만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삶을 영위하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 되레 돈도 벌기 어려운 글쓰기 자체를 비생산적인 사치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하지만 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충동. 어딘가 나의 감정을 토해내고 싶고 그것을 요연한 글로 정돈하고 싶다는 감각 등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오웰이 쓴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인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공감하며 자신이 글을 쓴 이유에도 이 네 가지를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앞선 이유로 모두 설명될 것이다.

내가 글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시발점은 ‘음악’에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작사를 위해 메모를 써왔고, 그날그날의 단상과 갑작스럽게 생각난 좋은 표현이 휘발되는 것이 싫어서 꾸준히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고 더 잘 쓰고 싶어졌다. 동일한 어휘를 쓰기 싫어서 동의어와 유의어를 찾으며 고민하다 보니 어휘력을 늘고 글이 더 좋아졌고, 그렇게 수필이 일상화되었다. 그 후 우연한 계기로 프리랜서 작가 일을 하게 되면서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용기를 얻어, 다니던 공대를 그만두고 영화 전공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역시 모든 예술은 연결되어 있고 돌고 돈다고, 음악에서 시작한 짧은 글이 결국 영화의 길도 발견케 했고, 현재는 또다시 글로써 마음을 다스리며 음악과 영화 공부를 하고 있다. 음악과 영화를 만들 때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글로 담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기틀을 짠다.



글쓰기는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 글을 쓰면 무의식적으로 그저 잠재하고만 있던 생각을 꺼내 펼치며 조직화하고 또 체계화해야 한다.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잘 읽힐 수 있게 다듬고 재단하게 된다. 글을 쓴 당사자 또한 읽는 이에 해당한다. 쓰고 읽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디서부터 이 생각이 시작됐고 그 시발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를 정리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스스로를 알게 된다. 내가 이런 부분에서 이런 감각을 느꼈고 그것은 내 개인의 역사의 어떤 경험을 건드려 나에게 이런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나를 알고 나를 달랠 줄 알게 된다. 나는 이런 감각을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고도 표현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큰 폭으로 자신에게 무지하다. 진정 내가 나를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오만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어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로, 원래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해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설령 나 자신이라고 해도 나 또한 나에게도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접근이 힘든 통제구역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을 알려는 노력은 수십 번 역설해도 부족하지 않다.

여유가 없으면 글을 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당장의 하루하루가 급한데, 밥을 먹는 데 잠을 자기 위해 돈을 벌기 급급한 삶이라면 어떻게 그 시간을 쪼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사는 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살게 된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글로써 사유하며 나를 더 잘 알아차려주고 달랠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고 아프면 보듬어주고 힘들면 쉴 줄 알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수단으로 글만한 것이 없다. 종이와 펜만 있다면 언제든 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업이 된 글쓰기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이 많은 글을 쓰며 나를 알아가고 싶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각들을 환영하고 나를 알아줄 수 있도록 시간을 내서 글을 쓰려 한다. 이 모임에 등록하게 된 데에도 그 이유가 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리고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글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가지는 작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도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쉽고도 어렵기에 그 시작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솔직할 용기만 있다면 글은 나를 안아주게 된다. 글로 느끼는 쾌를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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