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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희 Jun 13. 2024

[YEAR에세이] 찰나의 찬란함

스물에 대한 기록

   스무 살의 한허리가 베어진 6월, 문득 어릴 적 스물에 대한 상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내가 바라본 스무 살은, 학창 시절이라는 방대한 퀘스트를 완수하고 성인이라는 문턱을 자신 있게 넘어선 듯 보였고, 내가 아직 하지 못한 경험들을 통해 유연한 어른스러움과 주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막상 스무 살이 되어보니, 스무 살의 '나'는 당연스럽게도 여전히 '나'였고, 아직도 어리숙했으며, 되레 나이의 무게에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간극을 메꾸기 급급했다. 유연함보다 뻣뻣함, 여유보다 조급함, 설렘보다는 부담감이 느껴지는 나이였다. 조금 더 머리가 크고 나면, 나의 주관에 따른 선택으로 주변에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것 역시도 아니었다.

   20살이 된 순간, '학생'이라는 보호막에서 벗어나 보니 마냥 나를 배려해 줄 것 같은 세상은 '성인'이라는 두 글자 명목으로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은연중의 배려까지 모조리 몰수해나갔다. 19금 영화를 제한 없이 볼 수 있고, 술과 젊음의 패기가 어린, 여러 향락적인 낭만들은 너무나도 별게 아니었고, 나의 경우 그다지 그런 것들을 즐기는 편이 아니기에 (재수해서 느낄 시간도 없었지만) 득보단 실이 많은 셈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흔한 "20살 되면 남자친구도 생기고 살도 빠져"라는 거짓말에 농락당한 피해자였다. 내가 더 많이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다 여겼던 많은 것들이, 그 그늘 한정에서 발현되는,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님이 차례차례 밝혀졌다.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나치게 스물의 낭만을 깨버린 듯해, 마치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발설한 짓궂은 삼촌처럼 죄책감이 약간은 들지만 (물론 산타클로스는 존재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게 잘못이냐고 우기면 그만일 것이다. (글쓴이의 인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뒤 그 사람 그럴 줄 알았었다며 관상부터가 그릇되었었다고 말하는 관상가 양반 노릇이 아니다.
   이미 이전의 열아홉 차례나, 나이라고 불리는 것의 숫자는 해마다 바뀌어왔고, 12월 31일마다 부풀었던 기대는 항상 비눗방울처럼 설렘과 함께 날아가 버렸었다. 단지 이번엔 십의 자리가 2로 바뀐 것뿐, 점점 늘어가는 나이에 서러워질 만한 연령대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동에서 청소년,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나를 설명하는 단어의 일부가 바뀐, 단지 그뿐이었던 것이다.

   일례로 나이를 든 것이지, 으레 모든 것은 그래왔다. 남들보다 유난히 상상력이 풍부한 공상가여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기대는 항상 현실보다 높았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응 아니야~"를 외치며 놀리듯 도망가는 현실을, 실망감을 느낄 새 없이 뒤쫓기 바빠
(기대, 실망 느낄 새 없이 적응하기 바쁨, 또 기대, 실망 느낄 새 없이 적응하기 바쁨...)
이 황당한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인간의 실수는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알아차리고 보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아주 근사하고 폼 날 거라고 기대했던 것들은 틀린 그림 찾기처럼 살짝 자세만 비틀어놓고는 달라진 거라며 우겨댔고, 또 당하냐며 비웃었다. 분했던 것도 잠시, 그 환상을 즐겼던 그때의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분명 스무 살은 내 기대와는 달랐지만. 중요한 건 그 까까먹던 꼬마가 내 밥그릇 내가 챙기려는 사람이 된, 그 현저한 변화였다. 밥 한 숟갈 먹어서 배 안 부르지만 그 숟갈 여럿이 모여 배가 불러지는 것처럼 하루하루 뭐가 그렇게 바뀌는지도 몰랐던 그 사소한 시간들이 모여 이렇게나 많이 커지고 달라졌더라.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사이로, 우리의 일부는 조금씩 구석구석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복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 아주 막 살진 않았구나~"하고 금세 나 자신에게 기특함이 느껴졌다.
   자신감과 여유도, 유연한 어른스러움도, 매일매일의 아주 사소한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기민함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20살의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수확은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 거라고, 우리가 경외감을 느끼는 그 대단함 마저도 사실 여느 노래 가사처럼 찰나들이 모여 찬란해진 거라고, 중요함을 결정짓는 건 어쩌면 기막힌 묘수가 아닌 사소한 습관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투정은 조금만 부리고 한 번에 많은 걸 바라는 도둑놈 심보가 아니라 이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보자고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게 된 '나'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한 스무 살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한 걸음 정도는 내디딘 것 같으니 이 정도면 족한 게 아닐까?


20.7.7.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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