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오늘아침1라디오 예술로 떠나는 여행
붓과 먹 스토리
https://brunch.co.kr/magazine/artandtravel
붓과 먹에 이어서 오늘은 벼루인가요?
지난주 방송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한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유럽에서 k-한지의 인기를 실감하고 계시다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지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또 붓과 먹 한지까지 했으면 마지막 벼루 이야기도 꼭 들려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청취자분들이 계셔서 오늘은 문방사우의 지필묵연 중 연인 벼루로 떠나는 예술여행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방사우의 으뜸은 뭔가요?
지난 시간부터 한국의 문방사우 붓, 먹, 종이, 벼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예전부터 선비들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문방사우의 네 가지 보배 가운데 벼루가 으뜸이죠 '붓과 먹과 종이는 모두가 세월과 함께 없어지지만 오직 벼루만이 평생을 함께 할 수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선비들과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필기구는 바로 벼루였습니다. 보통 가지고 계신 물건들 중에서도 손때 묻고 오래 쓴 물건들이 가장 애착이 가듯이 선비들에게도 벼루는 가장 아끼고 애틋한 소장품이었던 것이지요.
벼루는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드나요?
우선 벼루를 만드는 과정은 맑은 소리의 원석을 두드려가며 원하는 벼루의 크기만큼 다듬어주고, 망치, 정, 조각 칼만을 이용해 먹을 갈아내는 부분과 먹물이 보이는 부분까지 정교하게 다듬으면 기본 모양의 벼루가 탄생하는데요 단단한 돌의 특성상 조금만 힘을 줘도 돌에 금이 가거나 깨져버리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벼루는 사실 종이나 붓에 비해 큰 비중이 없지 않았나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요, 지필묵연중에서 벼루는 옛 선비들의 사랑이자 그들이 평생 곁에 두는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옛 선비 문인들은 벼루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며 애지중지하였다고 하는데요.
특이한 점은 예로부터 중국 예술의 특색은 기와와 벽돌에 있고, 일본 공예의 특색은 목칠에 있으며, 조선 공예의 특색은 석공에 있다고 할 정도로 예로부터 선비들에게 벼루는 돌로 만든 대표적인 문방구이자 특별한 예술품이라고 여겨왔던 건데요. 무엇보다도 벼루문화의 가장 큰 가치는 돌로 된 조각품 자체로써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 속에 포함된 인문정신에 있습니다.
옛날 선비문인들은 벼루를 한낱 돌로 된 물건으로 보지 않고,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벼루는 옛 선비들의 풍류의 전당으로 통하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벼루에 먹을 가는 행위를 수행이라고 여기며 벼루에 먹을 갈며 철학・문학・예술을 논하곤 했기 때문에 벼루는 문인들 곁에서 평생을 같이하는 정신적 동반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각별한 물건이었습니다.
벼루를 거의 친구처럼 대했군요?
맞습니다. 어떤 선비들은 죽으면 벼루를 같이 순장해 달라고도 했고 닳아서 못 쓰게 된 벼루는 땅에 묻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벼루를 문인정신과 선비문화의 결정체라고도 하는데요. 벼루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자 했던 선비문인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학문과 창작을 본분으로 삼던 문인정신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 보면 사실 보잘것없는 작은 돌이지만 그 은혜로움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이런 행동들을 통해 정과 의리를 중시하던 선비정신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져 가는 벼루문화의 고찰을 통해 옛날 선비들의 문인정신과 선비문화를 다시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벼루의 조건 같은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벼루의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塘)이라 하고, 먹물이 모이는 오목한 부분을 연지(硯池)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벼루를 만드는 돌은 굴곡이 중요하기 때문에 너무 딱딱해도 너무 물렁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단단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또 무르면 먹을 갈 때 벼루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사실 좋은 벼룻 돌을 캐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벼룻돌은 조각할 수 있는 돌이어야 하기 때문에 세밀한 입자 형성이 된 돌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회석(靑灰石)이라는 돌을 벼룻돌로는 최상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회석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북도의 위원석(渭原石)과 충남의 남포석(藍浦石)이 대표적인 벼룻돌로 꼽혔는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님께서 "남포벼루 3개를 구멍 냈다."라고 자랑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고 멀리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벼루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길래 선비들이 벼루를 모으는데 혈안이 됐을까요?
벼루의 인기가 선비들 사이에 하늘을 찌르자 심지어 조선시대에 벼루 인플루언서까지 등장합니다.
바로 돌에 미친 장인 '석치' 정철조 님이신데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에 벼루의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벼루가 생산되었으며 그중 명품으로 여겨지는 소장용 벼루까지 나오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벼루메스라고 불러야 할 듯한데요.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석치라는 호로 볼린 정철조 님이 만든 명품 벼루였습니다. 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미친 바보 석치라는 호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석치 정철조 님은 문과에 급제한 관리 출신으로 과학, 기술, 천문, 수학, 예술에 능했으며, 천문 기계와 농기구, 지도까지 직접 만들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면 될까요?
특히 그는 벼루 만드는데 최고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녔죠. 바로 마음에 드는 돌이 보이면, 바로 깎아서 벼루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속도까지 빨랐다고 하죠. 주변에서 엄청나게 감탄을 했다고 하고요. 벼루의 달인 그 자체였던 듯합니다.
정철조 님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나요?
서툰 장인이 연장을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있죠? 그는 연장과 재료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즉 돌의 종류도 가리지 않았고, 그 돌이 가지고 있는 모양과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 예술의 경지의 벼루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요, 이러한 그의 작업 속도와 예술혼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은 정철조의 벼루를 하나 가지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벼루에 대해, 당대 선비들은 이런 평가를 합니다.
그의 벼루는 지금까지 본 천여 개의 벼루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강세황)
"본래 생김새에 따라 약간의 요철을 그대로 살려 두었지만, 갈고 깎은 정밀함 만큼은
보통 사람이 절대로 미칠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다."(심노승)
다만, 그의 벼루의 실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철조의 벼루 그림]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벼루를 감상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을까요?
네 국내에 딱 하나뿐인 벼루박물관이 있습니다. 바로 손원조 관장님께서 운영 중이신 경주 화랑로 경주읍성 인근에 위치한 취연벼루박물관인데요 이름자체도 '벼루에 취했다'는 의미를 가진 멋진 박물관입니다.
2019년에 개관해서 다양한 벼루를 모아놓은 벼루전문 박물관인데요. 그동안 국립박물관이나 대학박물관 등에서 전시실 일부에 벼루 수십 점을 전시하는 곳은 더러 있었지만, 벼루만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은 전국에 취연벼루박물관이 유일합니다.
삼국시대 흙벼루를 시작으로 고려시대 풍자벼루, 조선시대 오석벼루, 자석벼루, 옥벼루, 수정벼루는 물론 나무벼루, 쇠벼루, 도자기벼루 등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벼루 100여 점이 선을 보인다. 하지만 관장님이 소장하신 벼루가 무려 1500여 점에 달하신다고 하는데요 이 가운데 100점 씩 정도만 전시를 하고 계시다고 해요.
나머지 1400여 점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계신면서 기획전이나 특별전 콘셉트에 따라 벼루를 나눠서 전시하고 계십니다. 벼루뿐만 아니라 120년 된 종이, 105년 된 먹, 벼루를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그릇인 ‘연적’, 벼루나 먹을 넣어두는 나무상자인 ‘연갑’, 벼루와 먹을 담아두는 작은 책상인 ‘연상’, 먹이나 물감이 묻은 붓을 빠는 그릇인 ‘필세’, 책장이나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두는 물건인 ‘문진’ 등 다양한 문방사우를 구경할 수 있으니 휴가때 경주를 방문하실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취연벼루박물관
https://inkstonemuseum.modoo.at/
*참고 자료
https://minirecord.tistory.com/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