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최근에 아주 멋진 공연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무려 93세의 할머니께서 현역 예술가로 무대에 서시는 공연이 8월의 마지막 날에 열리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국내에서 최고령 전문 공연 및 연기인으로 무대에 오르시게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요.
93세의 나이에도 무대에 오르시는 할머님, 어떤 분?
8월 31일 여성국극 1·2·3세대가 최초로 함께 하는 역사적인 무대에 캐스팅되신 소리꾼이십니다. 판소리 춘향가에 등장하는 변사또역을 연기하실 1951년에 데뷔하신 이소자 할머님이신데요 그리고 한 분이 더 계십니다. 같은 공연에서 월매 역을 맡은 조영숙 할머니는 90세이시고 두 분 모두 1948년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 여성국국단원으로 데뷔하신 분이시죠.
안산시에서 열린 여성국극 춘향전 포스터
여성국극은 무엇?
국악중에서도 ‘창극의 갈래로서 연극의 한 장르’라고 보시면 되겠는데요. 그래서 여성국극을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창극을 먼저 이해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극이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역할을 나눠서 노래하고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을 말하는데요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판소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1인극입니다. 쉽게 말하면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춘향이도 되었다가 이몽룡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고 창극은 배역이 모두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배역마다 대사 톤부터 해서 의상이나, 성별을 모두 다르게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국극도 단원 여러 명이 참여하기 때문에 창극의 형태를 지녔지만 모든 배역을 여성이 맡아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시작은 1948년 여성 국악인 30여 명이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 반발해 국악원에서 떨어져 나와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였습니다. 판소리 명창 박녹주를 대표로 김소희, 박귀희, 임춘앵, 정유색, 김경희 등 여성 명창등이 참여해 1948년 10월 ‘옥중화’라는 창립 공연을 열었습니다. 여성들만 단원이었기 때문에 여성국악인들이 남장을 하고 공연했죠. 이듬 해인 1949년 ‘해님달님’ 공연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전쟁 중 피란지에서도 공연이 열릴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전쟁 이후 더욱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중예술의 총아가 된 것이지요
어떤 공연들을 만들어서 했나?
당시 한국은 근대국가로서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전통문화의 고 레퍼토리를 고루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시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성국극은 과감한 시도로 한국의 음악, 의상, 정서까지 가득 담은 화려한 뮤지컬을 창극에 접목하여 여성국극단만의 스타일을 가진 공연으로 완성해 냅니다. 당시 유행하던 신파 소설, 외국 소설, 심지어 ‘투란도트’ 같은 오페라까지 가져와서 만들었는데요. 예로 오페라 투란도트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해서 무대를 만든 것이지요. 판소리의 창법은 가져왔지만, 대사, 음악, 의상, 연출, 배역 등에 뮤지컬 시스템을 도입하여 창극과 뮤지컬을 합친, 당시로서 굉장히 파격적인 연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여성국극단의 전성기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이다 보니 대부분 희망을 주는 해피엔딩을 통해 관객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공연들을 주로 상연했습니다.
인기는 어느 정도?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1950년대였는데요. 특히 남성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사실 판소리에서는 이몽룡과 성춘향은 10대인데 나이 많은 명창들이 이몽룡을 연기하시다 보니까 시각적으로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데 여성국극은 달랐습니다.
20대, 30대 여성단원들이 남성 분장을 했기 때문에 ‘꽃미남’ 같은 느낌으로 이몽룡을 연기했고, 관객들이 더욱 몰입하게 되었고 열광하게 된 거죠 그래서 여성국극 단원분들이 남주인공 배역을 맡기 위해서 굉장히 치열한 경쟁을 하셨다고 합니다. 남자배역을 맡기 위해서는 일단 무조건 소리를 잘해야 했고 외모나 키도 중요했습니다. 극단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남자배역이 굉장히 중요한 흥행요소가 되다 보니 남자배역의 캐스팅에 굉장히 공을 들인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여성국극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는데요
당시 단원으로 활동했던 원로선생님들의 말씀을 빌려보자면 출산일이 임박했던 만삭 관객이 이 순간을 놓치면 여성국극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 공연을 보러 왔다가 공연을 보는 도중 진통이 와서 극장에서 출산을 했던 기억이 있다.라고 하셨고 당시 한 여성팬이 결혼을 해달라고 하도 졸라서 실제로 조금앵 선생님께서는 턱시도를 입고 팬분과 함께 가상 결혼식 사진을 찍었던 사진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성국극단은 팬덤을 가진 슈퍼스타 아이돌그룹이었던 거죠.
지금도 잘 이어져오고 있나?
아쉽게도 여성국극단은 현재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계신데요, 1950년대 당시 만해도 여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혁신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어마어마한 팬덤이 있었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여성국극단의 멤버들이 단 몇 년 만에 대중예술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고 단원들이 벼락스타가 되다 보니 갑자기 많은 돈이 생기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것이 단원들을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어서 여성국극의 시초인 여성국악동호회가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학 양성을 잘 못했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여성국극을 하던 명창들이 당시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 무대에 서시기 바빠 후학양성을 하실 교습책이나 교재도 만드시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가르칠 시간도 없으셨던 거죠. 그래서 해체 후엔 그 회원들이 전국각지로 흩어져 여러 단체를 만들기는 했지만 원년멤버들과의 호흡이나 노하우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티브이가 보급이 되면서 여성국극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tv나 방송 쪽으로 진출하신 분은?
네 계십니다. 아무래도 티브이가 보급이 되면서 여성국극단원뿐만 아니라 많은 공연예술인들이 방송계로 뛰어드셨는데요. 여성국극단 역시 전통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흥행을 중시하는 연극적인 요소도 많았기 때문에 국립창극단 같은 연주인 단체로 입단하기보다는 영화나 tv, 대중음악계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배우 송일국 씨의 어머님으로도 유명한 김을동 씨입니다. 김을동 씨는 여성국극 2세대로 여성국극단원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그다지 뚜렷한 두각을 보이시지는 못하셨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굉장히 큰 인기를 얻으셨고 국회의원까지 역임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인연으로 국회에서 여성국극 콘퍼런스를 여시기도하고 여성국극을 알리시는데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
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의 열정과 헌신 덕분에 여성국극은 그 명맥을 이어올 수가 있었는데요 그리고 특별한 것은 올해 굉장히 많은 여성국극 공연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근데 올해 여성국극공연이 부활하게 된 계기가 굉장히 특별한데요 바로 ‘웹툰’ 덕분입니다.
웹툰과 여성국극의 연결고리는?
네 바로 웹툰 정년이라는 작품 때문에 여성국극이 부활의 서막을 맞이했는데요 2019년부터 4년간 137화로 연재되었던 정년이가 바로 여성국극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소리 재능을 타고난 목포 소녀 윤정년과 소리꾼들의 성장과 연대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동안 웹툰이 영화·드라마·연극·뮤지컬로 제작되는 경우는 흔하지만, 창극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올해 처음이었고 국립창극단에서 올 3월 초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김태리 배우님이 정년이 역할을 맡아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웹툰의 성공에 힘입어 여성국극단이 재조명되자 뿔뿔이 흩어졌던 여성국극단 1세대 2세대 3세대가 모여 전통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이라는 타이틀로 8월 31일 안산에 위치한 문화예술회관에서 상연된 것이죠.
개인적인 바람은?
이러한 여성 국극이 더욱 활성화되고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또 다른 문화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술의 다양성을 알리는데도 매우 매력적인 공연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창극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전통 문화 예술에서 왔다는 것. 이렇게 발전되는 모습이 진정한 전통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