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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 Oct 20. 2016

정장을 입으면 일을 잘하게 될까요?

[관습 돋보기] 복장과 기업문화

오후 두 시, PMS(프로젝트 관리 시스템)에서 새로운 업무가 할당되었는지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습니다.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 메신저에서 그룹웨어로 들어갔는데, 낯선 팝업창이 나타났습니다. 이른바 '복장착용규정 준수 강조' 공지였습니다.


마침 오늘 저는 반팔 라운드 티셔츠, 회색 후드집업, 발목이 드러나는 밑단에 쫄쫄이가 달린 청바지(일명 조거팬츠)를 입고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복장규정의 '제한복장' 조항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네요 :-)


학창시절에 한 번도 안 해본 복장불량을...



*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거나, 규정의 낱말을 따져가며 반박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직업관과 동기부여, 조직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기업문화에 대한 건전한 토론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장이 주는 이미지

저의 직업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입니다. 모든 직업에는 고유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편견이라기 보다는 상징 같은 것입니다.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이나 후드가 달린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패셔너블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는 무서운 열정을 보이는 Geek의 이미지입니다.


왠지 후리하게 입어야 더 신뢰가 가는 Geek 이미지


패션 전체주의자의 폭력

저는 20대 중반까지 넥타이를 벨트처럼 매고 다니던 패션 실험주의자였습니다. 그 뒤로는 옷에 답이 정해져있다고 믿는 패션 파시스트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면전에서 말은 안해도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옷이 한벌 뿐인가?'라며 남을 평가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뀐 것은 나의 복장을 지적당하면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거의 셔츠를 입습니다. 그렇지만 작년 여름에는 어쩌다보니 라운드 티셔츠를 자주 입게 되었습니다. 먼 지방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주말에만 집에 오다보니, 차 없는 뚜벅이로써 옷을 거의 챙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선배에게 라운드 티셔츠를 지적당하며 한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라운드 티셔츠의 목을 손가락으로 당기며) 야, 회사가 장난이냐?"


그 순간에 저는 태어나서 몇 번 겪어본 적 없는 굉장히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당장에 "입사면접 때 복장 제한이 없다고 들었다"며 반박했지만, 제 분은 도저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저는 사내추천을 받아서 면접을 본 것이므로 어떤 업무를 할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야근, 연봉, 복장 세 가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특히 복장은 그 회사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에, 면접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물어봅니다. 복장제한이 있었더라면 입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을 겪고 며칠이 지나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복장을 은근히 경멸했었던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복장을 왜 신경쓸까? 회사에서는 왜 정장을 입어야 할까?


정장을 입으면 일을 잘하게 될까요?

누군가는 캐주얼한 복장이 회사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한 '비즈니스 캐주얼'을 권하기도 합니다. 마치 옷을 멀끔하게 차려입으면 생산성이 올라갈 것처럼 복장을 규제합니다. 혹은 후리한 복장이 회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이 녀석은 철지난 힙합바지를 입었으니 생산성이 5 밖에 안되는군
정...정장을 입었더니 생산성이 올라가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획일화된 복장이 동기부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복이 그 증거입니다. 중고교 6년 동안 똑같은 교복을 입고 누구는 서울대에 가고, 누군가는 판치기를 합니다.


저처럼 흰셔츠의 빳빳한 칼라만 보면 갑갑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혀 놓으면 의욕이 떨어집니다.


결국 핵심은 어떤 옷을 입느냐가 아니라, 내적 동기부여에 있습니다. 손바닥 회초리로 쪽지시험 점수는 올릴 수 있겠지만 결국 실력이 되는 건 '왜 공부를 해야할까?'에 대한 답을 찾은 아이들입니다. 물론 저는 학생 때 그 답을 못 찾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며 '왜 일을 해야할까?'에 대한 답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다양성을 제거하고 표준화된 '리소스'로 만드려는 것처럼 보이는 회사의 결정이 참 안타깝습니다.


학생의 품위는 깨끗한 교복이 아니라 성적에서 나옵니다. 회사의 품위는 정장을 빼입은 직원이 아니라,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만드는 소프트웨어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기업의 경영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복장이나 출근시간을 점검하는 대신 우리가 만드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그 업무로 직원의 역량이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점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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