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라디오_이찬혁 편
<우산(이찬혁비디오 앨범)을 듣고>
검은 바다에서 처음 만났던 소녀가 하얀 침대 위에 누워 고백합니다.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싶다고요. 길들일 수 없는 야생성의 등에 앉아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자유가 통제된 장소를 지나고 싶다는 소원에 귀를 기울입니다. 훗날 소년은 소녀에게 흑백의 스트라이프 죄수복을 선물해요. 커플룩을 입은 그들은 함께 거리를 내달립니다. 횡단보도 앞에 다다라서 소년은 소녀의 앞에 등을 내밉니다.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빨간 신호등에도 자유로이 횡단보도를 건너요.
두 눈을 감고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가장 박탈된 해병대에서 만든 ‘해야’라는 인물과의 일탈, 저도 자유라는 거 한번 해보려고요. 어렸을 적부터 라디오 키즈로 자라면서 디제이를 꿈꿔왔다는 구태의연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글로라면 라디오 DJ가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죠. 하늘을 날 듯 가벼운 마음으로 잡식성 라디오, 지금 시작합니다.
♩ FREEDOM, 악뮤(AKMU), [항해] 5번 트랙
잡식성 라디오 첫 곡은 자유였습니다. 반갑습니다. 브런치에 음성을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이런 콘셉트를 떠올려보았어요. 굳이 라디오 형식이어야 하는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소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소개해드릴 음악은 뭐냐... 악동으로 데뷔한 지 어언 10년, 다리 꼬지 말라던 어린 뮤지션이 어느덧 걸출한 프로젝트 앨범까지 냈습니다. 이찬혁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먼저 이 여름에 어울리는 노래 한곡 듣고 오실까요?
♩ 어푸(Ah puh), 아이유, [LILAC] 9번 트랙
이찬혁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이었습니다. 후렴구를 듣다 보면 바다 위에서 첨벙거리는 것 같죠. 항해라는 앨범과 함께 읽으면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책 〈물 만난 물고기〉를 아시나요? 그 속에 등장하는 해야라는 인물과도 어울립니다. 소년은 비 오는 선상에서 〈뱃노래〉를 부르던 소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해야와의 추억은 짧았습니다. 소녀는 떠나기 전 ‘의미를 알기 전에 버리지 말아요.’라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나요. 마치 〈고래〉처럼 미숙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습니다. 파도가 칠 때 더욱 설레하는 이 곡처럼 천진난만하죠.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영화를 한 편 본 기분입니다. 솔로로 낸 정규 앨범은 특히 그래요. 뮤지션의 사고현장을 본 〈목격담〉으로 시작하여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가지만 〈파노라마〉를 보며 죽어갑니다. 혼령이 된 뮤지션은 사랑하는 이에게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만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에는 회신하지 못해요. 결국 〈장례희망〉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장례식 풍경을 묘사하며 앨범을 마무리짓습니다. 이번에는 이 앨범 중에 하나 들어볼까요? 사는 동안 사랑했던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고 싶은 의지를 담은 곡입니다.
♩ 당장 널 만나러 가지 않으면, 이찬혁, [ERROR] 5번 트랙
해야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면 그냥 넘길 수 없을 가사가 들리죠? ‘해야, 할 말이 있어.’ 분명 해야할 말이겠지만 일종의 확증편향인가 봅니다. 청자가 짜깁기한 이스터 에그라고 해두죠. 죽음을 앞두고 예전 연인이었던 해야를 찾아가는 이미지에 감동이 더해진다면 억지여도 괜찮습니다. 억지 부린 김에 한번 더 부려볼까요?
이 앨범을 소개하기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찬혁비디오라는 프로젝트 앨범은 음악 꽤나 들었던 리스너라면 반가운 곡들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윤상부터 브로콜리너마저까지, 광고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곡들로 채운 앨범을 개그우먼부터 운동선수까지 더 다양한 목소리로 담았습니다. 이번 앨범의 한곡 한곡을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소개하고픈 단 한 곡이 있습니다. 듣고 오실까요.
♩ Romantico (Vocal. 한로로), 이찬혁비디오, [우산] 8번 트랙
원곡은 테테라는 남성 뮤지션의 솔로곡이었습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투개월이란 혼성 듀오의 오디션 프로그램 버전이었죠. 한로로라는 여성 뮤지션이 혼자 부르는 노래가 서글프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낭만적인 곡의 분위기로 그리는 사랑하는 이와의 황홀함을 순서대로 그려봅니다. 남성의 고백, 둘만의 시간, 혼자 남은 여성의 쓸쓸함으로 들립니다. 후렴구 가사를 읽어보죠. ‘오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했지. 지금 우리는 춤을 추고 있어. 비밀스러운 몸짓과 노래로’
눈을 감고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미루지 않아야겠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할 상상은 남에게는 억지로 보이기 십상이잖아요. 어차피 나의 마음을 환희로 채울 억지라면 기꺼이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겠습니다. 뜬금없이 연을 날려봐도 좋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한 곡 더 듣고 오시죠.
♩ 연 날리기 (Vocal. 임시완), 이찬혁비디오, [우산] 3번 트랙
벌써 마칠 시간입니다. 어떠셨나요? 이 뮤지션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면 이 라디오의 목적은 이룬 셈입니다. 그 방식이 무엇이든 이찬혁이라는 뮤지션의 음악성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기대하는 일은 리스너의 권리가 아닐까요? 그러한 기대를 담아 오늘의 마지막 곡 들으면서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라디오 하면 끝인사 멘트가 중요하다죠? 조만간 다시 찾아올 테니 간결한 게 좋겠습니다. 또 봐요.
♩ EVEREST (with Sam Kim), 악뮤(AKMU), [NEXT EPISODE] 7번 트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