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식성 경청꾼 Jun 30. 2023

웃어도 되는데

<장애인(사우스 코리안 파크)을 보고>

 우리의 뇌는 아름다운 것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기사의 제목에 ‘충격’이나 ‘분노’ 같은 단어들을 포함하면 조회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찾을 수 있다. 정보 자체를 모른다면 사회에서 도태될 확률이 높다.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가 생존에 밀접하다. 건너편 언덕에 노을이 예쁜 자리가 있다는 사실보다 비가 내리는 밤마다 호환마마님이 민가에 내려온다는 소문이 뇌리에 더 깊이 남는다.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다. 구글이나 애플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자신들이 게시한 광고를 볼 수 있도록 인간의 본능에 맞춘 알고리즘을 활용한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스마트폰 액정에 집중하게 만들려면 자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짧은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에게서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도서를 추천받아 가장 자극적으로 다가온 정보들을 추려보았다.

스마트폰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잠들어야 할 시간을 잊을 정도로 이미 우리의 뇌는 편리함에 절여져 있다. 알고리즘은 또 어떤가? 요즘 음원 사이트는 내가 듣는 음악의 다음 곡을 알아서 선곡해 준다. 추천 알고리즘 계의 으뜸은 역시 유튜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홈 피드에서 추천하는 영상 중 스크롤을 내리며 볼 만한 섬네일을 터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에는 앱을 열어 가장 첫 번째에 뜨는 영상이 가장 보고 싶은 영상이다. 보통 구독한 콘텐츠의 최신 영상인 경우가 많다기엔 얼마 전 뜬금없는 영상 하나가 나의 홈 피드 첫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장애인’이라는 단 세 글자 짜리 제목에 처음 접하는 채널의 최근 영상이었다. 미국의 사우스파크라는 블랙코미디 애니메이션을 오마주한 ‘사우스 코리안 파크’라는 채널명을 가지고 표방하는 바는 분명했다. 영상의 내용은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 A와 유치원 때부터 친구인 B, 그러한 장애인을 처음 만나는 C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덕분에 화면 해설이 없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장애인을 상대로 하는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2분이 채 되지 않는 영상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문득 섬뜩해졌다. 편하게 대하면 비하가 되고, 불편하게 대하면 차별이 된다.


 취업을 준비하던 흑역사 시절, 웃음이 멎으니 입꼬리와 함께 나의 일상은 축축 처져갔다. 그나마 6개월 만에 폐지된 동명의 공중파 라디오 멤버들끼리 모인 팟캐스트가 일종의 웃음 제세동기였다. 원래부터 친했던 이들이 팟캐스트로나마 만나서 놀자는 취지였기에 심의 규정은커녕 사회통념마저 아득히 넘어섰다. 전기자극과도 같은 애드리브에 정신이 아득해져 나는 그들의 유머에 중독되어 갔다. 연예인들답지 않게 자신의 가정사나 우울증 따위를 꺼내놓으면 다른 이들이 놀리고 웃어넘기는 식이었다. 마니아가 많아 놀림을 당하기 위한 청취자들의 사연도 마르지 않았다. 나의 사연도 한 방울 떨어뜨려보았다. 당시에는 한쪽 눈이 실명하고 다른 쪽 눈까지 시력이 감퇴하는 중이었다. 웃음으로 나의 고민을 가볍게 만들고 싶었다. 범죄나 웃음은 지을수록 가벼워진다.


 “애꾸야, 너 합격하면 내가 네 직장 가서 가오 한번 살려준다!”


 “겁나 싫어하는 거 아니야? 동료들은 모를 수도 있잖아ㅋㅋ”


 “너 애꾸였어? 이러면서ㅋㅋㅋ”


 가까운 목적지에서 함께 웃고 나니 멀리 있는 목표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결국 그때 목표했던 취업에 성공해서 지금까지 악착같이 직장을 버티고 있다. 해피엔딩으로 보이겠지만 이러한 행복은 반 쪽 짜리였다. 그들이 나의 근무지에 찾아올 일은 없었다. 그 팟캐스트는 결국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서 산화되었다. 대중이 웃지 못할 유머는 비하이자 차별이었다. 다른 논란으로 시작되었던 불씨가 하마터면 나의 사연 탓에 장애인 비하로까지 번질 뻔했다. 결국 사회 통념에 반하는 방송을 들으며 시시덕거리던 벌로 다시 살아난 웃음의 취향은 징역에 처했다. 나의 형벌이 이 정도였으니 그 방송을 제작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더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내가 취업에 성공했을 때 나의 핸드폰에는 진행자 중 맏형의 축하 연락이 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석방이랄지 탈옥이랄지 나의 취향이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스트레스받을 때 자극적이고 매운 음식으로 푸는 사람도 있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내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열 뻗치는 일이 있던 지인의 취향에 맞추어줄 정도의 의리는 있다. 우리는 매운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술 못 먹는 이가 안주빨을 세운다면 매운 떡볶이를 힘겨워하는 이들은 튀김빨을 세운다. 내가 낼 식사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저것 튀김과 순대를 고르니 지인은 음식을 가지고 오며 가득 찬 쟁반에 헛웃음을 지었다. 지인은 이것 좀 보라며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었다.


 “뵈는 게 없으니 맘껏 먹어봐야지.”


 지인은 바람 빠진 웃음을 냈다. 웃기지 않으면 어떠랴? 눈살 찌푸리지만 않아도 반은 성공이다. 눈살만 찌푸린다면 나야 모를 일이니 상관없기도 하다. 이것도 유머다. 사실 웃기기보다 웃는 것이 내 전공이니 이해 바란다. 실패한 유머가 내는 끔찍한 결말을 잊지 않았다. 나의 장애가 터부시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팠다. 물론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니 260만 장애인의 대표성은 1도 없겠다. 나 하나 대표하니 1은 있으려나?


 자극적인 콘텐츠가 우리의 집중력을 훔쳐 간다고 한다. 사람들은 멀쩡히 걸어가다 벽에 부딪치는 영상에는 웃음을 터뜨리지만 내가 벽에 부딪친다면 다큐가 된다. 내가 웃기기보다 웃는 데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없는 이가 되더라도, 조금은 반 사회적인 인간이 되더라도 나는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것들에게 관심을 두련다. 집중은 좁아지는 반면 관심은 넓어진다. 허소든 비소든 실소든 미소든 더 많은 사람들이 웃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웃으면 따라 웃게 되는 내가 더 웃음 짓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읽을 당신이 지금보다 많이 웃기를 바란다.

https://youtu.be/e6_Y2FBWT0U


작가의 이전글 함께 걷는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