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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Jul 14. 2023

지나치지 않는다면 지나칠 수 없을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을 읽고>

 출근길 아침, 시민들이 지하철을 타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단체가 있었다.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배경은 2019년의 런던, 수년 전 단신으로 보도된 기사를 접하여 멸종저항이라는 단체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 덕분이랄지 수년 동안 종이컵을 이용하지 않고 텀블러를 사용해 왔다. 환경에 관심이 늘어난 만큼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이번 기회에 완독 한다!' 작은 결심을 세웠다.
 환경운동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도서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환경진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셸런버거 역시 책을 쓴 의도는 같았으리라. 하지만 나의 지식은 심약했다. 텀블러와 종이컵의 탄소 발자국 차이가 220배나 된다니. 종이컵을 하루에 한 컵씩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텀블러는 8개월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계산만으로도 충격이었다. 반면 인류가 지구에 얼마나 유해했는지를 주장하는 멸종저항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책을 시작한 저자는 한참 멀리 나간다. 환경이라는 카테고리의 도서가 원전이나 육식을 긍정하거나, 개발도상국에게 저임금 노동이나마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우는 주장을 하리라고 누가 기대할까? 가지고 있는 시계의 초점이 맞는지 확인하려 유명하다는 시계공에게 갔는데 시점을 돌려버린 것과 다름없다. 본 독후감의 목적은 급격한 시차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문제가 과거의 해결책이었다는 생각의 전환이 새로웠다. 책은 상아로 당구공을 만들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하던 문화가 플라스틱이 발전되면서 극복된 사례를 소개한다. 최근에는 상아 없는 코끼리도 태어난다더라. 석유의 발전으로 줄어든 포경업도 궤를 같이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가 산림녹화에 성공한 이유는 공을 들여 심은 나무를 땔감으로 활용하지 않을 정도의 기술발전 덕이랜다. 저자는 선진국들이 구명보트에 더 이상 자리가 없다며 사다리를 걷어찰 것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힘써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요는 간단하다. 지금의 해결책이 미래에 문제가 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듯 답을 찾을 것이다. 도서의 원제이기도 하듯 'Apocalypse never', 종말은 없다.
 역사는 늘 종말론과 함께였다. 어느 시대든 말세였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필멸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 언젠가 인류는 멸종한다. 적어도 생명체로써의 나와 나를 기억할 후손들은 반드시 소멸할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명분으로 강요하는 규율보다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마음가짐이 더욱 값지다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 이 도서에서 얻을 수 있던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 책을 읽고 굳힌 3계명을 적어보자.
 먼저 잡식성인 인간으로서 다양한 영양분을 편식 없이 챙기겠다. 먹는 즐거움은 소중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일본인들의 장수 비결인 소식을 실천하리라. 과유불급이라고 했으니 과식은 말자. 다음으로 값싼 상품을 고장 날 때까지 쓰겠다.. 나라는 인간도 지구라는 행성도 쓸만한 것들을 버릴 정도로 부유하지 못하다. 흔한 말로 우주의 먼지라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만든 저가형 상품을 소비한다면 나의 경제력도 좋아지고, 쓰레기도 줄고, 개발도상국의 생산성도 높아질 테니 일석삼조다. 마지막으로 모든 의견을 쉬이 지나치지 않겠다.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6년 230일밖에 없다는 뉴스를 듣고 원전을 지켜야 한다는 환경운동가의 책을 읽었다면 제3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경청해 보면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명확해진다.
 몇 년 전부터 서울에서도 장애인 단체가 시민들의 지하철 출근길을 막는 시위를 진행했다. 비장애인인 지인들은 같은 장애인인 내 의견을 궁금해했다. 2019년 런던에서 일어난 시민 불복종 운동에 대해서라면 한결 정돈된 생각을 밝힐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였다. 결국 휠체어를 이용해 지하철을 이용할 일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일도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장애인 인권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나로 하여금 다양한 의견을 접하도록 만든 것이다.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은 누군가의 불편에 비해 너무도 저렴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맞는 정보만을 과식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나는 기울어진 낭떠러지와 꽃이 만개한 정원 사이 어디쯤에 서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 구르는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착각이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력의 방향으로 흘러가다 보면 이 세상이 종말과 가깝다는 두려움이 커진다. 어쩌면 극단에 치우칠수록 종말에 가장 가까운 건 그러한 사상을 가진 당사자가 아닐까? 나라는 인간이 아무리 유해하더라도 지구를 위해 죽기는 싫다. 이 지구 위에서 사는 동안 모두와 함께이고 싶을 뿐, 서로를 지나치지 않는, 서로에게 지나치지 않은  인류, 그런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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