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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Oct 28. 2024

깨뜨려 터져나올

인생 처음 탕후루를 맛보고

  비닐봉지를 여는 소리가 아삭거렸다. 콧속을 간질이는 향기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좌식 테이블 건너편에 쓰러지듯 앉았다. 나무막대를 두드리는 방향으로 손을 내밀었다. 끈적함 하나 묻지 않고 손잡이를 집은 스스로가 어지간히 갸륵했다. 얼핏 매끄러워 보였지만 분명 달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터였다. 막대기 끝에 꽂혀 있는 작은 종이컵이 손에 닿았다. '애들이나 좋아할 맛이겠지.' 염세적이던 10분 전의 스스로가 민망해질 만큼 입에 침이 고였다.

“한 손으로는 막대를, 다른 손으로는 종이컵을 잡아 봐. 이렇게 컵을 올려 가면서 먹는 거야.”


  한입에 반짝이는 알맹이를 삼켰다. 입 안 구석으로 사탕만 한 알맹이를 몰았다. 턱에 힘을 주어 깨뜨린 순간 스테비아 토마토 과즙이 터졌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이미 유행이 조금 지났다던 탕후루를 이제야 처음 맛보았다. 녹인 설탕물에 꼬치에 꿴 과일을 담갔다가 꺼내어 굳히는 단순한 조리 과정이 무색했다. 토마토 다음은 귤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만큼 다양한 맛을 느껴보라며 '프루트 믹스' 맛을 골라준 탕후루 선배의 선택은 탁월했다.


  “오빠가 왜 주저하는지도 이해가 가. 근데 나는 용기를 가졌으면 싶어.”


  Y는 제 손에 들린 탕후루를 우적우적 씹으며 본론을 꺼냈다. 당장 간식을 다 먹으면 미리 정해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직전까지도 머무적거렸다. 중증 시각장애인이 된 지도, 중증 시각장애인으로서 공직에 임했던 기간도 나보다 오래인 Y였다. 서른이 넘어 실명을 하고 나서 시각장애 동료로 소개받은 Y의 말을 들어 손해를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나와의 인터뷰 영상을 업로드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 한 달 전, 출연료 삼은 탕후루를 씹으면서도 이에 낀 사탕처럼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전날, 일종의 사전 인터뷰를 나누었었다. Y는 내 장애 정도부터 그를 받아들였던 계기,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등을 물어볼 것이라고 했다. 외려 대답하기 낯설었다. 눈이 나빠지고 나서 가까이할 일이 없던 거울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쩌면 처음 제대로 눈을 맞추는 장애인으로서의 나였다. 그렇게 Y의 질문을 따라 곰곰 거울 속 내 모습을 뜯어보던 중 흠칫 몸을 움츠려야 했다. 장애를 받아들인 계기라고?


  “그건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렵겠어. 가족들한테도 말한 적 없거든.”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그래?”


  대단할 건 없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를 되레 작은 접점을 가진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막내아들 고3 때 남편을 여의고 홀로 3남매를 키우신 어머니께 나는 여전히 어린 애였다. '탕후루 맛나더라.' 같은 말은 못한다. 당이 어떻고, 치아 건강이 저떻고 같은 잔소리가 선하다. 대신 초등학교 저학년인 조카와는 설탕옷을 입은 과실의 맛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이런 잡념을 한 귀퉁이에 둔 채 생애 처음으로 무거운 고백을 꺼내놓았다. 그 순간 Y의 표정이 해사하게 빛났다.


  “그래.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가 필요한 거야!”


  가까워진 고개와 커진 목소리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흐린 얼굴에 선명한 눈빛은 하루가 지나도록 거부감을 녹였다. 나는 하나 남아 입 안에서 굴리던 탕후루를 와그작 깨뜨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샤인 머스캣으로 만든 것이었다. 입 안에 넣고 깨뜨려야만 알 수 있는 이 맛도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모를 즐거움이었다. 해보기 전부터 겁을 먹기에는 뵈는 것도 없었다. 가득 차오른 당 덕분일까? '일단 나한테 얘기하듯이 말해봐. 찍어보고 별로면 편집해도 되니까.'라는 격려에 한결 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카메라를 작동시킬 시간이었다.


  “알겠어, 잘 이끌어 줘.”


  양치도 할 겸 화장실에서 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거실이 부산스러웠다. 방문을 열자, 그럴듯한 촬영 스튜디오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 개의 바 의자와 밝은 조명, 그 사이에 카메라 거치대까지. 나는 셔츠 앞주머니에 소형 마이크를 꽂았다. Y는 카메라 앵글과 시선 처리 등을 꼼꼼히 신경 쓰고 나서 크게 한 번 손뼉을 쳤다. 컷 사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공무원이시면서 시각장애가 있으시다고요?” 어느덧 익살스러운 진행자가 된 Y가 인터뷰의 물꼬를 텄다. “제가 정말 미인인데, 보여드릴 수도 없고.”


  금세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10여 년 전 처음 공직에 임할 당시의 내 모습과 5년 뒤 중증이 된 장애 정도, 코로나 덕이랄지 온 세계와 함께했던 칩거 생활, 자립하고자 향했던 지역의 시각장애인 복지관, 그곳에서 배운 점자와 흰 지팡이 보행법, 복직 후에 근무하고 있는 요즘의 일상, 올해 꼭 이루고픈 목표 등 그가 터주는 물길에 몸을 맡겼다. 이윽고 가장 가파른 물살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Y가 장애를 받아들인 계기를 묻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안압 탓에 하루가 다르게 시력이 떨어졌어요. 어떤 방법으로도 안압이 떨어지지 않으니까, 병원에서는 눈 안에 물이 나오는 기관 자체를 레이저로 지지는 시술을 추천해 줬죠. 마취에서 깨고 나면 엄청 아파요. 진통제를 굉장히 센 걸로 처방해 주더라고요. 안 먹고 참았어요. 훗날 이 약을 한꺼번에 먹어보자. 나쁜 목표로나마 고통을 견뎠어요. 약이 충분히 모인 어느 날, 불가피하게 그 날짜를 한 번 미루어야 했죠. 이 일만 마치고 먹자. 근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더라고요. 계속 미루다 알았어요. 이 약을 먹기 싫은가 보다. 살고 싶은가 보다. 결국 장애가 있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어요.”


  고백이란 털어놓을수록 가뿐해졌다. 처음 몇 문장 되지 않는 고백을 마치고는 무거운 짐이라도 이었듯 손이 발발 떨리고 온몸이 후들댔었다. 반면 실전에서는 '생각보다 금방 털고 일어나셨네요.'라는 진행자의 말에 '열심히 털었습니다.'라며 같잖은 몸짓까지 해보였다. 어쩌면 나 카메라 체질일지도? 허튼 생각은 모든 촬영을 끝내고 녹초가 되면서 썰물처럼 쓸려갔다. 갈증이 올랐다. 목을 축이고 의자에 녹아내리듯 몸을 늘어뜨렸다. 한편 Y는 내게 물을 가져다준 곧바로 편집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어느 무엇에도 아랑곳 않고 영상 편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두워졌을 적부터 반짝이던 별들이 사라져갔다. 그들을 잇기 어려웠다. 달달 외던 별자리를 잊어갔다. 장애를, 받아들이면서 가장 먼저 빛을 잃어간 건 나였다. 다만 식어가고 굳어갈 뿐이었다. 반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Y는 아직 빛나고자 바동거리고 있었다. 단념하면 안 될 것까지 단념했던가? 빛바랜 앙금은 집에 돌아와서도 끈적였다. 눈꺼풀 사이에 부서진 별의 먼지라도 낀 듯 일상이 개운치 않았다. 한숨짓던 어느 오전,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식은 녹차로 엉클어진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Y가 5분 남짓의 영상과 함께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근데 이거 오빠 걱정만큼 자극적이지 않아.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 다만 오빠 주변 사람들도 몰랐던 이야기라고 해서 그게 마음에 걸려. (중략) 영상 업로드랑은 무관하게 오빠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떤 어려움이나 역경이 닥쳤을 때 방법의 차이이지 저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편집을 서두른 이유가 영상을 향한 열정 때문만이 아님을 짐작할 만했다. 부끄러워했던 과거를 Y에게 처음 고백해서 다행이었다. 영상을 공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너스레가 고마웠다. 내가 장애를 받아들인 계기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으리라. 나 역시 액정 너머까지 불어오는 Y의 바람 덕에 흔들리는 마음을 메시지에 담아 전송했다.


  “나는 그런 과정이 있어서 지금 잘살고 있다고 생각해. 괜찮아. 근데 세상 제일 아픈 고통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 모습 보는 거더라고. 지금 아픈 모습만큼 과거에 아팠다고 말하는 것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이니까? 이렇게 아팠어!'라고 말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거니까. 그게 걱정이야.”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Y는 흔쾌히 알겠다고 말해주었다. 한편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탕후루 가게 근처를 걷고 있었다. 녀석에게 가장 먹고 싶은 간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스크림, 캐릭터빵, 슬러시. 가게의 문 바로 앞까지도 기대하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탕후루는 어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결국 가게 옆 편의점에서 초코빵을 사주었다. 빵 봉지 안에 든 캐릭터 스티커가 마음에 든다며 녀석이 나를 향해 와락 안겨 왔다. 뚜렷한 주관에 미래가 기대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탕후루를 좋아하리라는 편견 역시 깨뜨려야 했다. 남들에게 편견을 깨어 달라며 소리를 낼 줄만 알았었건만 막상 내가 가진 편견 너머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Y에게 짧은 메시지로도 충분한 결심을 전했다.


  며칠 뒤, 가족들이 모두 모인 단체 대화방에 링크 하나가 올라왔다. '힘들게 합격한 공무원, 퇴사해야 하는 걸까요?' 범인은 누나였다. 누나는 평소 Y가 운영하던 채널에 구독과 알림 설정을 해놓았던 모양이었다. 유튜브에 영상이 업로드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어머니부터 조카까지 가족 전원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링크를 공유할 만큼 행동이 날랬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졌던 결심을 붙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숨 한번 들이쉴 여유도 없이 곧바로 가족들의 반응이 올라왔다.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야.”


  “얘 잘생긴 척하는 거 봐.”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장애를 받아들인 만큼 가족들 역시 진즉 나라는 가족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1천 회 남짓 조회수에 달린 몇 개의 댓글들 역시 소담했다. 나를 오롯이 응원하고 있었다. 연민이나 혐오 따위의 우려하던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늦은 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본가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서는 늘 밥 먹었냐는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영상을 잘 보셨다며 내 경험을 궁금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 실명하기 전에 보았던 익숙한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문득 지금 어머니의 얼굴에 늘어 있을 주름이 궁금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주말에 봐요.”


  부서진 편견들 사이에서 막대만 한 조각 하나를 집었다. 쭈그려 앉아 사각사각 획을 긋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활자를 빚는 일은 무리였다. 대신 파편들을 한데 모아 잘게 빻았다. 부끄럽고 부러운 과즙이 가득 찬 알맹이를 꼬치에 꿰었다. 이 모든 과정에 열중하다 보니 내뱉는 숨이 더워졌다. 따뜻하게 데운 파편의 가루 안에 지난 기억을 담갔다가 꺼냈다. 식어가고 굳어간 덕에 설탕옷이 아주 잘 발라졌다. 별사탕처럼 볼록볼록한 파면이 반짝거리며 손끝을 간지럽혔다. 이로써 다디단 과실의 맛을 한결 오래도록 남길 것이었다. 점자로 빚어낸 글이라는 탕후루가 어두운 밤을 반짝반짝 비추었다. 이 글을 맛볼 당신의 입가가 깨뜨린 편견에서 터져 나온 과즙으로 달뜨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OWaq_krk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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