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지 않는 수용은 체념과 같은가. 적어도 거리끼고 막는다는 의미의 장애(障礙)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과 다르지 않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질병에 비유한다면 그 후유증은 쉬이 체념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아무리 애지중지했던 관계나 선물도 잃어버리고 나면 끝이다. 애초부터 없었다면 결핍이라고 여기지도 못한다. 다만 체념하고 그냥 살아가는 대신 장애물에 맞서 살아내는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나는 저항하기를 욕망한다.
눈이 나빠지고 나서 많이 의지했던 취미는 라디오와 책 읽기였다. 라디오가 매력적인 이유는 누군가의 기나긴 글을 읽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도 책을 덮을 때면 그 입장에는 끄덕이게 된다. 끝까지 귀 기울이기. 수용하하는 태도의 제1 원칙이다. 여성시대를 진행하는 양희은이 쓴 '그러라 그래'와 '그럴 수 있어',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로 인상 깊던 장기하가 쓴 '상관없는 거 아닌가', 라디오 선곡작가인 생선작가로 유명한 김동영의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책 제목만 보아도 라디오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는 수용하는 태도가 풍긴다.
김창완 아저씨가 말했다. 50개쯤 동그라미를 그리면 그중 두 개 정도만 그럴듯해 보인다고.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라고. 동그라미를 그릴 수 없는 나는 익숙지 않은 반항이라도 해본다. 정말 찌그러진 주제에 동그라미가 맞느냐고. 아침창의 마지막 방송에서 기타로 삑사리 가득한 월광을 들려주고는 홀연히 떠나버린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연주곡이 감동적이다. 마지막 방송이라는 감정에 복받쳐도, 아름다운 이 아침에도 달은 밝게 빛난다. 그러고 보면 달은 언제나 동그랄 테지만 그렇게 보이는 건 한 달에 한 번뿐이다.
이제는 저항하기를 욕망한다.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이유다. 운이 좋게도 그런 기회가 생겼다. 물론 지금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도 고마운 기회지만 지금은 라디오와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일주일 뒤에 출연할 라디오의 사전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다. 글쓰기를 위해서도 예열이 필요하다. 메모장을 열어 이 글을 적고 있다. '눈에 선하게'라는 화면해설 작가의 에세이를 쓰신 분들 중 한 분께서는 라디오 작가이기도 했다. 그분께서 보내주신 인터뷰지를 채워야 한다. 애정해 마지않던 라디오 감성과 책을 읽었을 때의 감명, 화면해설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감사를 담아 답변을 허투루 채워가기는 싫었다.
10월 6일 일요일, KBS 3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심준구의 세상 보기'라는 방송에 출연한다. 10시, 18시, 22시에 방송하되 다시 듣기는 없다. 시간 맞춰 들어야 하는 라디오의 낭만이 반갑다. 더욱 반가운 것은 예습 삼아 해당 방송을 들어보다가 김창완 아저씨가 저녁 라디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라디오는 계속된다.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누군가에겐 큰 위로다.
그 자리를 지키는 자체가 커다란 저항이다. 평화롭게만 느꼈던 라디오 제작을 위해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을 터였다. 살아남는다는 저항은 라디오에 위로받던 시절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길게 이 장애(長愛)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사랑을 지켜가기 위해서 나는 저항하리라. 주파수를 맞추고 안테나를 세운다.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