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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Dec 29. 2023

다시 처음, 안녕.

<뮤지컬 이토록 보통의를 관람하고>

 가끔 눈이 나빠지지 않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웹툰과 게임을 즐기고, 낯선 길을 발견하면 시험 삼아 걸어가 보는 나. 주말이면 혼자라도 공연을 관람하고 산책을 하다가 낯선 식당에서 혼밥을 하는 나. 그냥 예전의 나를 추억하는 수준인가. 상관은 없다. 시력이 좋았을 나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그 무언가 앞에서 이따금 상상에 나래를 펼친다. 발끝까지 뜨뜻한 침대에서 화면해설이 제공되는 뮤지컬을 관람하는 가장 황홀한 순간 녀석이 날갯짓 같은 손짓으로 내 곁에 날아든다.

시력이 좋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콘텐츠 소식을 접하자마자 티켓을 예매했다. 방구석에서 즐기는 뮤지컬이라니. 뭐 요즘에는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뮤지컬 실황 영상도 흔하고 음원이 있는 앨범도 많으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지만 실시간으로 화면해설을 해준다면 얘기는 다르다. 물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에는 걱정되는 면도 있다. 얼마 전에 베리어 프리를 신경 썼다는 연극을 관람했을 때 난해한 이야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던 기억이 있어 일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그런 걱정보다 당장 10분 전까지 아니, 1분 전까지도 예매해 두었던 페이지에 잘 접속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어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손이 바빴다.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인 건 최근 수면 패턴이 어긋나 8시가 넘으면 병든 닭이 되는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 속 공연장 입장을 헤맸으려나?


 심호흡을 하고 침대 벽에 베개를 두고 앉는다. 커튼이 걷히기를 기다려보자. 다행히 아주 흔한 핸드폰 스피커에서 뮤지컬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화면해설을 맡은 목소리는 본 공연이 카카오 웹툰인 '이토록 보통의' 중 '어느 날 그녀가 우주에서'라는 에피소드의  원작이라는 소개를 했다. 인물들의 차림새, 무대의 조명과 구조들이 2차원의 아기자기한 풍경으로 채색되어 갔다. 의아했던 것은 소개해주는 등장인물이 남녀 단 둘 뿐이라는 것이다. 단 둘이서 2시간 가까운 이 뮤지컬을 끌어갈 수 있을까? 잠시 멈칫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침대 맡에 둔 레모네이드를 홀짝였다.


 방 안은 빛 한점 없이 어두컴컴한 채로 두었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올 여린 빛이 침입해와 봐야 느끼지 못할 테니 어두운 도화지 위로 대사에 입힌 멜로디가 색감을 더했다. 웃음 띈 목소리로 밝은 피아노 반주에 맞춘 춤사위는 파스텔 톤으로, 마이너 코드 위로 내뱉는 한숨 섞인 멜로디는 세피아 색으로, 아무 반주 없는 나지막한 대사는 흑백으로 보였다. 공연이 행복한 연인의 모습으로 시작하니 공연히 질투 섞인 부러움이 올라왔지만 그러한 감정은 곧 안쓰러움으로, 충격으로, 그럼에도 안심하다가도 다시 충격으로, 안타까움으로... 이윽고 뮤지컬이 끝날 때쯤에는 헛헛함이랄지, 벅참이랄지 코를 훌쩍여야만 했다. 두 배우만으로도 충분한 스토리와 노래가 내 마음속에서 넘쳐 눈물이 찔끔했다. 실은 단지 뮤지컬 탓만은 아니다. 지금껏 인식해 온 나와 이별할 시간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흥미로운 철학서적을 읽었다. 로버트 프리츠의 정체성 수업이라는 책으로 이해한 선에서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나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자존감을 높이거나 정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를 규정짓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이 뮤지컬의 핍진성은 이러한 철학적 사고에서 온다. 후회되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은 또 다른 우주에 살고 있을 나, 나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든 나, 심지어 내 기억 속의 나와 지금 숨을 쉬는 나는 같은 사람일까. 여기에서 한 계단 더 나아가면 현재 나라고 인지하는 나마저 타자화된다.


 낡은 아파트의 불 켜지 않은 침실에 앉아 빈 레모네이드 페트병을 흔들었던 나도, 그러한 추억을 오래 남기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도, 조만간 이 글을 읽으며 여린 미소를 띨 한 살 많은 나도 모두 다른 사람이다. 아주 찰나밖에 살고 있지 않을 나이기에 다른 사람을 알 수도 없다. 옛 노래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웬만한 이들과는 이제 새해에 보리라. 나를 비롯하여 다시 만날 누구를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예의 있고 관심 있게 대한다면 세상이 한결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다행히 우리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망각이 축복인 이유이다. 그렇게 다시 처음 시작하는 새해에 반가운 인사를 이 뮤지컬의 감상으로 가름한다. 당신이 받을 어마어마한 새해 복을 이 글에 남긴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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