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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10. 2024

라면의 유통기한

-135

대충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이미 투표는 하고 왔으니 내일은 딱히 할 일도 없겠고 운운하는 생각을 하다가 슬그머니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오늘은 뭘 먹고 이 궁금한 입을 좀 달래보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한 개 남은 짜장면이 생각나 그거나 끓여 먹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리대를 뒤져 짜장면을 꺼내고 습관처럼 유통기한을 확인하던 나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짜장면의 유통기한은 3월 22일로, 이미 거의 20일 전에 만료 돼버린 후였던 것이다.


물론 변명거리가 전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짜장면은 집 근처 마트의 할인행사 때 집어온 것으로(네 개 들이 한 팩에 2천 원도 안 주고 사 왔으니 틀림없다), 이미 사 올 때부터 유통기한이 한두 달 정도밖에 안 남은 물건이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 유통기한을 20일 가까이 넘기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부랴부랴 냄비에 물을 받아 짜장면을 끓였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20일 지난 짜장면을 먹어도 되는가' 운운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잽싸게 그 짜장면을 먹어 치웠다.


어렸을 적만 해도 라면이란 건 무슨 통조림마냥 한 번 사다 재 놓으면 1, 2년은 끄떡도 안 했던 것 같은데(물론 사다 놓은 라면이 1년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요즘 라면의 유통기한은 또 생각보다 그리 긴 것 같진 않다. 할인하지 않는, 그래서 유통기한이 그리 임박하지 않은 라면을 살펴보면 대개 산 날로부터 6개월 정도까지가 유통기한으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그건 '유통기한'이 그렇다는 말이고, 실제의 소비기한은 유통기한이 끝나는 날로부터 대략 8개월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하니 20일 정도가 지난 짜장면을 먹었다고 무슨 큰 일이나 나지는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유통기한이 4개월이 훨씬 지난(발견 당시에 이미 4개월이 지난 상태였으니 지금은 한 반년쯤은 지났을 것 같다) 소면을 끓여 먹고도 지금껏 딱히 배탈이 난 적은 없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슬금슬금 게을러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히 저 짜장면을 사 올 때도 이깟 짜장면 네 개 한두 달 안에 다 못 먹겠나 호기롭게 생각하고 사 왔을 것이 틀림없는데, 일단 나는 그 한두 달 안에 짜장면을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것에는 실패한 셈이다. 이런 문제로는 나를 과신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내가 요새 많이 느슨해졌구나 하는 생각과 라면 한 팩을 넉 달 안에 다 먹어치우는 것도 생각보다 품이 드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번갈아 한다. 그리고 괜히 뒤가 저려서 남아있는 라면들의 유통기한을 한 번씩 다 뒤져 보았다.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에 불과한 신선식품도 아니고 실온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뒀다가 적당히 끓여 먹으면 되는 라면 하나조차도, 타이밍 놓치지 않고 먹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런 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그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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