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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11. 2024

게맛살의 유통기한

-136

그저께 짜장면으로 때아닌 쇼크를 한 번 당하고 나서 조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냉장고 안을 뒤쳐 남아있는 식재료들의 유통기한을 주루룩 챙겨 보았다. 그 결과, 얼마 전 게살스프나 한번 끓여 먹자고 산 게맛살이 정확히 4월 10일까지가 유통기한인 것을 발견했다.


본래라면 이렇게 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사는 게맛살은 대개 한 번 사서 절반은 게살스프를 끓이는 데 넣고 남은 절반으로는 그다음 날 남은 식은 밥으로 게살볶음밥을 해서 먹어버리면 정확히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는 어설프게 한 팩 더 붙어온 게맛살이 있었고, 이왕 준다는 걸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받아놓고 시간 조금 있으니 그 안에 먹으면 되겠지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아, 그래도 날짜 지나가기 전에 알았으니 그걸로 다행이지 않은가. 덕분에 어제는 원래 먹으려던 참치김치볶음밥 대신 게살볶음밥을 해서 한 끼를 잘 먹고 치웠다.


한 가지 더 찾아낸 것이 있다. 언젠가 한 번 쌀국수가 먹고 싶어져서 2인분이 든 한 봉지를 사서 1인분을 끓여 먹고 1인분을 남겨둔 것이 4월 16일까지가 유통기한이었다. 아, 이것도 정신줄 좀 놓고 살다가 꼼짝없이 그냥 버릴 뻔했구나 하는 생각에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일모레 식은 밥이 남은 날 무조건 끓여 먹어 없애기로 했다. 결국 이래서, 그저께의 짜장면은 그 한 몸을 희생해 게맛살과 쌀국수를 구원한 셈이니 이만하면 제가 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연거푸 생기는 건 누가 뭐래도 내가 나사가 풀린 탓이다. 그가 떠나고 난 직후에, 감히 그가 하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먹는 걸 사서 날짜 넘겨서 버리는 짓만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을 때는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2년이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나도 조금은 느슨해져 버린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사실 원래 나라는 인간의 천성 자체가 뭔가를 꼼꼼하고 챙기고 따지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못하기도 하고. 여기까지는 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게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저께의 짜장면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다지만, 오늘 발견한 게맛살이나 쌀국수는 모두가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아 남겨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게맛살도 쌀국수도, 그가 있었더라면 모두가 한 끼에 다 먹고 남아있지 않았을 분량이다. 그러게, 20년 이상이나 뭐든지 두 개씩, 2인분씩 사는 버릇을 들여놓고 그렇게 혼자 도망가버리면 남아 있는 나는 어떡하냐고, 내게도 그런 마지막 변명 거리 하나쯤은 남아 있다. 습관이란 무섭고 생각처럼 안 된다는 지나간 옛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도 추억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본다고, 안 돼도 해 본다고 그 노래는 그렇게 말하지만 별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내가 조금 더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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