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Apr 12. 2024

리암 니슨, 그리고 필립 말로

-137

마음이 좀 안정을 찾은 것인지 텔레비전을 꺼 놓은 조용한 집안이 예전만큼 크게 불편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텔레비전 소리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바로 밥을 먹을 때다. 밥 먹을 때의 정적만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아서, 철 지난 예능 vod라도 틀어놓고서야 가까스로 밥을 먹을 수 있다.


어제도 오늘은 도대체 밥 먹는 동안 뭘 틀어놓을까 하고 iptv의 vod 목록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못 보던 배너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 정장에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남자,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는 '탐정 말로'라는 제목까지. 이 배너는 나를 세 번 당황시켰다. 첫 번째. 저거 리암 니슨 아냐? 두 번째. 저거 필립 말로 얘기 아냐? 세 번째. 아니 그럼 리암 니슨이 필립 말로 역으로 나온단 얘기야?


리암 니슨이야 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내 딸을 유괴한' 놈들에게 '참교육'을 해주는 아버지 역할의 영화 '테이큰'으로 워낙 유명하다. 좌악 깔린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내뱉는 'I'll find you and I'll kill you'라는 대사도 워낙에 유명하고. 그러나 이 분은 테이큰 전까지는 소위 연기로 승부하는 연기파 배우였다. '쉰들러의 리스트'나 '마이클 콜린스' 같은 데서 나오던 그 중후한 신사가 오히려 나이도 잡술 만큼 잡순 후에 걸리는 놈들 죄다 두들겨 패는 액션 스타가 될 줄은 난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필립 말로라니. 필립 말로는 한 푼 두 푼 받은 용돈을 모아가며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의 문고판 책을 사다 모으던 시절부터 추리소설 팬이었던 내가 꼽는 '멋진 탐정' 대략 3위 안에 들어가는 캐릭터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미국 작가가 쓴 필립 말로 시리즈는 추리소설 답지 않게 어딘가 애수 띠고 서정적인 문체로도 유명하다.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필립 말로의 대사 한 구절로도 알 수 있듯이. 요컨대 이 영화는,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좋은 것 더하기 좋은 것,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수준의 종합 선물 세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리암 니슨도 좋고 필립 말로도 좋지만 필립 말로 역할을 하는 리암 니슨이라니. 언뜻 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필립 발로는 조금 더 날렵하고 거친 느낌이라 리암 니슨 식의 둔탁한 파괴력과는 살짝 엇박이 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나는 밥 먹으면서 볼 프로그램을 찾던 것도 잠시 잊어버리고 그 배너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저거, 나중에라도 볼까 말까 하고.


그러고 보니 개봉 예정인 영화를 보고 호기심이 동한 건 작년의 슬램덩크 이후에 처음이구나 싶다. 슬램덩크야 순수하게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한때 좋아했던 만화에 대한 의리가 절반 정도는 됐었으니 순수한 영화만으로는 '탐정 말로'가 처음이 아닐까. 그 사이 많은 영화들이 흥행했지만 나는 그 영화들 중 한 편도 보지 않았다. '파묘'도, '서울의 봄'도, '오펜하이머'도, '노량'도. 그리고 그러던 내 마음이 오늘 그 배너에 아주 잠깐이나마 움직였다. 나는 어쩌면 조금씩이나마 나아져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맛살의 유통기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