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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13. 2024

세월이 가면

-138

지금은 좀 시들해진 감이 없지 않지만 한때 서바이벌 리얼리티가 그야말로 종류별로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돌을 뽑는 서바이벌, 아나운서를 뽑는 서바이벌, 배우를 뽑는 서바이벌 등등. 자극적인 편집과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심사위원들의 독설에 질려 어느 순간부턴가 슬그머니 보지 않게 되었지만 처음엔 꽤나 재미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런 서바이벌 리얼리티의 붐을 가져온 프로그램의 두 번째 시즌이었을 것이다. 다소 통통한 체형의 여성 참가자가 한 명 있었다.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주목받는 참가자는 크게 서넛 정도였고 그중에서도 두 명이 누가 봐도 우승후보였으며 그녀는 그 안에는 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애청하던 그와 나의 관심도 그녀에게서는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방송분에선가, 그녀는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그야말로 시절을 타지 않는 명곡이라 할 만한 이 곡은,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어지간해서는 그 곡에 담긴 '정서'를 살리기가 쉽지 않은 곡이다. 그러나 당시에 20대 초반에 불과했던(어쩌면 그보다 더 어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곡을 너무나 멋지게 불렀고, 그 장면을 지켜본 그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쟤는 나이가 몇 살인데 세상 다 산 사람마냥 저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고 그래. 그게 그가 한 평이었고 내 생각도 대충 비슷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우승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꽤 좋은 성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날의 그 '세월이 가면' 무대가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도 기억한다. 그렇게 서바이벌은 끝나고 그녀는 프로그램의 후광을 벗고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다소 통통하던 체형은, 어느 날 갑자기 놀라볼 만큼 날씬하게 살을 빼고 나타난 모습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같은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서바이벌 출신의 많은 참가자들이 그러하듯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새 음원을 낼 때마다 간간이 들려오던 그녀의 소식은 점점 잊혀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아침, 나는 그녀의 뜻밖의 부고에 잠시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향년 30세라는 뉴스기사의 표기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30세라니. 향년이라는 말이 붙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지. 후속 기사들에 따르면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같고 지인 모임 중 쓰러져 심정지가 왔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래도 억장이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일을 겪기에는 턱없이 어린 나이라는 점이 달라지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사람 목숨이 왜 이렇게 덧없는지, 별 수 없이 그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홀로서기를 하면서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결국 그녀는 그 서바이벌에서 불렀던 '세월이 가면'을 뛰어넘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그 서글프다 못해 청승맞은 가사를, 지금보다도 한참이나 어렸던 그때의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멋들어지게 불렀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 또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떠나갔구나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우울했다. 하필 이맘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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