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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2. 2024

라떼의 분홍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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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다소 비분강개한 제목의 글이 카페 게시판에 올라왔다. 도대체 뭔 일인가 하고 눌러봤더니 회사 급식에 맛도 없는 분홍 소시지가 자꾸 나와서 짜증 난다는 글이 캡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댓글로 그 계란 묻힌 분홍 소시지는 현재 중간 관리자급에 해당하는 70년대 생의 애착반찬이라 아예 빼버리면 클레임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아마도 관련 업계에 종사하시는 듯한 분의 답글이 달려 있었다.


그 아래 댓글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아니 그 분홍 소시지가 얼마나 맛있는 건데 아마도 어린 친구라 뭘 잘 모르는 모양이라는, 그야말로 '라떼 드립'이나 그리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은 성토가 벌어졌다. 중간에 한 명씩, 근데 그 소시지 너무 밀가루 맛 많이 나서 좀 별로이지 않으냐는 눈치 없는 말을 했다가 괜히 도매금으로 싸잡혀 그 맛에 먹는 거라는 맹폭격(?)을 덩달아 같이 당하는 딱한 분이 몇 분 계셨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백반집 같은 곳에 가면 싼 맛에 많이 나오는 그 계란 묻힌 분홍 소시지를 싫어하는 또래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분홍 소시지는 식재료로써의 용도가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에(여러 소리 할 거 없이 얇게 썰어 계란을 발라 지져내듯 굽는 것 말고 다른 요리에는 쓰기가 급 애매해지는 것이 사실이긴 하므로) 그 소시지를 달아놓고 먹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소시지는 분명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먹고 싶어지는 반찬인 것이 사실이긴 하고 아울러 그 양에 비해 가격도 대단히 싸기 때문에 우리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꼭 그 소시지를 사다가 계란에 부쳐 한 끼 반찬으로 잘 먹곤 했었다.


엄마 아빠는 그거 맛있다고 드시는데 나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를 모르겠다고, 저는 그냥 먹던 스팸이나 먹겠다는 말을 보다가, 벌써 내 나이가 저런 말을 들을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해졌다. 아무래도 회사를 나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정기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젊은 사람'이 없어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나 또한 이미 그런 식으로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도 다 그런 식으로 나이를 먹어가고 있구나, 하고. 작년에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슬램덩크만 해도 거기 정대만이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다는 말을 보고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보고 한참이나 눈물 나게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 나오던 태섭이의 어린 여동생이 아마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 진짜 뭐 하면서 사느라 이렇게 나이만 먹어버렸지 하는 서글픈 생각에 나도 모르게 좀 울적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뭐, 모르겠다. 라떼 드립이고 뭐고, 나이를 먹었고 뭐고, 말이 난 김에 그 분홍 소시지나 사서 집에 잔뜩 있는 계란물 발라 구워서 밥이나 한 끼 맛있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걸 뭔 맛에 먹냐니, 니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 다분히 꼰대 냄새나는 멘트는 덤이다. 그러게, 내게도 내가 영원히 젊고 아름다울 줄만 알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낡고 지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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