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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3. 2024

도마 모시기

-148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는 대단히 마음에 드는 도마 하나를 발견하고 한동안 요리를 할 때마다 도마 잘 샀다는 말을 몇 번씩 늘어놓곤 했다. 사실 쓸만한 도마는 가격도 제법 비싸고, 그 이전에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딱 맞는 도마를 찾는 것부터가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인지라 또 시작이네 생각하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렇게 천년만년 쓸 것 같았던 도마는 언제부턴가 표가 나게 틀어지기 시작하더니(모서리 쪽을 누르면 표가 나게 끄덕거려서 칼질하는 게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급기야 어느 날부터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금이 간 도마는 그 틈에 음식물이 끼기도 쉽고 그 음식물에서 세균이 번식할 염려도 많기 때문에 더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던 도마를 3년 남짓밖에는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 금이 간 도마는 양념대 선반 아래에 바닥 대신 깔려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도마를 자의 반 타의 반 폐기당하고 우리는 한참을 심사숙고한 끝에 가구와 생활용품을 파는 걸로 유명한 한 다국적 기업의 매장에 들러 도마 하나를 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원래 쓰던 것보다는 좀 마음에 덜 차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의 '도마 모시기'가 시작되었다. 새로 산 도마는 길을 들여야 한다고, 그는 집에서 간단한 목공을 할 때 쓰던 사포로 도마 표면을 한 번 갈아낸 후 일부러 마트에 들러서 사온 무려 식용유도 아닌 포도씨유를 도마에 골고루 펴 바른 후 하루를 말렸다. 나는 새 도마를 쓰기 전에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되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나무로 된 도마는 아무래도 습기에 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간 도마를 쓰고 물로 씻은 후 마른행주로 대충 닦아 세워놓았던 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우리 집은 세상없어도 도마를 쓰고 나서 물로 닦은 뒤에는 바람이 통하는 베란다에 도마를 모시고 나가 반드시 세로로 세워서 놔두었다가 물기가 다 마르고 난 후에야 제자리에 갖다 놓는 다소 번거로운 루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애지중지 관리하던 도마를 1년도 채 써보지 못하고 멀리 가버렸다.


그는 떠났고, 이제 그 도마는 내가 쓰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배운 탓인지 나는 답지 않게도 도마를 쓰고 난 후에는 물로 씻어서 역시나 베란다에 세로로 세워서 물기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자리에 갖다 두는 매우 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 그가 처음에 도마를 잘 길들여놓고 내가 답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쓰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이 도마를 사 와서 쓴 지 3년 남짓 되어가는데도 이 도마는 전혀 뒤틀림이나 금 가는 기색이 없어서 아직은 몇 년 정도는 끄떡없이 더 쓸 것 같다.


알량한 양파 한쪽을 썰고, 그거나마 썼다고 부랴부랴 물에 씻어서 베란다까지 가지고 나가 도마를 말리면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귀찮은 짓을 도마를 한 번 쓸 때마다 하게 됐는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미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나라는 인간의 거의 모든 습관과 일상은 그가 만들어놓고 떠난 거라는 사실을.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이상, 나는 웬만해서는 그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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