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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6. 2024

그래서 먹었습니다, 분홍 소시지

-151

원래 식단상 어제는 파스타를 해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냉장고 속에 딱 한 번 정도 뭔가를 해 먹을 수 있는 생크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걸 해치우는 용도였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이 제멋대로 밥솥에 쌀을 퍼담고 물까지 부어버린 상태였다. 뭐, 할 수 없었다. 파스타는 주말의 별식으로나 먹도록 하고, 그냥 밥을 먹는 수밖에.


다음날 먹을 식단이 오늘로 당겨지는 거라면 참치 마요를 해 먹으면 됐다. 그러나 썩 땡기지가 않아 한참을 미적대다가 며칠 전 브런치에 썼던 분홍 소시지 생각이 났다. 갑자기 그 '싼티 나는' 맛이 몹시도 그리워져서, 나는 불문곡직 지갑을 들고 집 근처 슈퍼에 가서 아주 크고 실한 놈으로(사실 그것 한 종류밖에는 파는 게 없긴 했다) 소시지 하나를 사 왔다.


바닥이 넓은 스텐 그릇에 계란을 두 개 풀었다. 이 커다란 소시지를 다 부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적당히 반만 썰어서 계란 물을 묻히고 지지기 시작했다. 소시지는 너무 잘 익다 못해 금세 오버쿡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불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몇 번을 부치고 났더니 절반도 많았구나 싶은 정도의 태산 같은 소시지 부침이 접시에 그득히 쌓였다. 남은 계란물은 프라이팬에 두르고 휘휘 저거 스크램블 비슷한 것을 만들어 밥에 얹고 그 위에 첩을 욕심껏 뿌렸다. 이렇게, 이른바 '라떼용 분홍 소시지 정식'이 뚝딱 차려졌다.


정말 참 지독하리만큼 '아는 맛'이었고 그러나 그래서 퍽 반갑기도 했다. 역시나 나 혼자 먹기에는 절반도 너무 많아 3분의 1 접시쯤은 그냥 남아서, 남은 소시지는 싸두었다가 내일 반찬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될 거 3분의 1만 구웠으면 세끼 반찬 정도는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유통기한도 한 달 남짓 남은 데다 한번 포장을 훼손해 버려 더 이상 밀봉상태도 아닌 소시지를 오래 놓아두는 것도 딱히 좋을 인은 아니겠지 하고, 그저 빨리 먹어치우는 데 의의를 두기로 한다.


그렇게 흰 밥에 알록달록하기까지 한 분홍 소시지 부침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맛있는데 뭐가 밀가루 맛 나서 못 먹겠다는 거지. 아 뭐 맛없으면 안 먹으면 되고, 이렇게 맛있는 거 안 먹으면 안 먹는 사람만 손해지 뭐. 뭐든 그렇다. 세상에는 의외로 맛있고 즐겁고 행복한 것들이 구석구석 처박혀 있고,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만 손해일뿐이다. 이건 그가 늘 하던 말이기도 하니까,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덧. 원래 올라와 있던 소시지 사진은 제가 요리한 것이 아니라 구글링해서 찾은 이미지였는데 저작권이 있는 사진이었던 모양입니다. 실제 사진이 별로 예쁘게 찍히지 않아서 구글에 있는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었는데 미처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집 나온 고냥 님께 사과드리며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만 개의 레시피' 사이트에서 이미지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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