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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pr 27. 2024

너무 싼 건 대개 비지떡이다

-152

지난 11월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넉 달간의 입원 후 집으로 돌아온 나를 맞은 것은 현관 앞에 널브러져 있는 택배 박스 하나였다. 그 속에 든 것은 인생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고 입원하기 며칠 전에 샀던 물탱크에 넣어서 쓰는 타입의 변기 세정제였다. 무려 30개를 만 원 조금 넘는 가격에 팔고 있는 걸 보고 덜컥 사 버렸던 기억이 있다. 워낙 별거 아닌 물건이어서 그랬는지. 그 박스가 집 앞에 서너 달을 방치돼 있는 동안 아무도 집어가지 않은 것이다. 새삼 우리나라 택배는 웬만해서는 분실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나던 순간이었다.


요즘 나는 그 변기세정제를 뜯어서 사용하고 있는 중인데, 만족도가 영 좋지 않다. 새것 하나를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혼자 사는 집 화장실이니 하루에 내리는 물의 양이 어느 정도 빤한데도 벌써 물의 색깔이 희끄무레하게 빠지기 시작하고 있어서, 이래서야 아무리 30개씩이나 들었다고 해도 마트에서 제 값 주고 사 오는 네 개 들이 제품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다 쓰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영 언짢아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 쓸 땐 혹시나 했는데 두 개째 넣어본 것도 비슷한 시간만에 물 색깔이 옅어지는 걸 보니 그냥 원래부터 수명이 저 정도밖에는 안 되는 제품인 모양이다.


비슷한 증상은 의외로 내 일상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단박에 들 수 있는 두 번째 예가 두루마리 휴지다. 마트에서 사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만원 안으로는 사기 힘든 30 롤짜리 두루마리 휴지를, 인터넷에서는 클릭 몇 번에 6, 7천 원이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산 휴지들은 대개 길이가 짧거나 혹은 매우 허술하게 감겨 있어서 돌아서면 어느새 하나를 다 써서 다음 휴지를 내다 걸어야 하기 십상이다. 위에 쓴 변기 세정제와 정확히 같은 케이스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제 값 주고 사는 휴지에 비해 어딘가 휴지의 질 자체도 좀 시원찮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 것은 아주 좋은 물건을 훨씬 싼 가격에, 굳이 나가서 직접 사 오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구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 것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수많은 함정이 있고, 그래서 인터넷으로 뭔가를 사는 것이 직접 가서 물건을 사는 것에 비해 무조건 싸고 좋다는 식의 맹신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이젠 웬만큼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번번이 이런 식으로 '싸게 파는' 변기 세정제에, 두루마리 휴지에, 당장은 생각나지 않는 수많은 물건들에 낚이고, 그 물건들에 실망할 때마다 역시나 싼 게 비지떡이고 다신 안 사야겠다고 다짐하다가 또 얼마 후 그 결심을 홀랑 까먹고 똑같은 물건을 또 사고 또 후회하기를 끝도 없이 반복한다. 이건 아마 내가 컴퓨터니 핸드폰을 통해 뭔가를 살 수 있는 이상은 끝없이 계속될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요즘은 좀 든다.


당장 얼마 후엔 두루마리 휴지를 사야 한다. 지금 쓰는 두루마리 휴지도 그런 식으로 낚여서 샀고, 요 앞에 샀던 마트에서 제 값 주고 사 온 휴지에 비해 너무 만족도가 떨어져서 다신 인터넷으로 휴지 안 산다고 이를 갈고 있는 중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그런 식으로 이를 간 건 치고 정말로 그렇게 지켜진 것이 뭐 있기나 했던가를 떠올려보면 또 슬그머니 자신이 없어진다. 그냥 산다는 건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다짐하고 잊어버리고 다시 다짐하기를 반복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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