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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01. 2024

인형 눈알을 붙이다가 랍비 만난 썰

-217

이번 주말 동안 지인을 도와 포장하고 있는 박스는 우체국 택배 박스 기준 2호 크기다. 27*18*15 정도 크기의 이 박스는 아주 표준적인 크기의 택배 박스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이런 박스를 한 100개쯤 접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에이 내내 쌓아두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말 동안 그 정도 놓아두는 건 괜찮지 하고 내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우리 집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나 뭐든 다 그렇지만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이 별 것도 아닌 박스를 40개쯤 쌓아놓기 시작하자 집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다 포장한 박스만 문제인 것도 아니고 포장해야 할 물건들과 에어캡, 아직 미처 접지 않은 박스 등등이 너저분하게 쌓여서 순식간에 집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변하고 말았다. 사람이 사는 집에 택배 박스를 쌓아놓은 게 아니라 택배 박스를 보관하는 창고에 내가 잠깐 얹혀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본래도 사람 둘 살기에도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고 그 와중에 집을 딱히 먼지 한 톨 안 앉도록 치워놓고 사는 성격은 아닌지라 사방팔방에 낯선 물건들이 널려 있으니 거짓말 좀 보태서 집의 공간 절반 정도가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탈무드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그런 우화가 있다. 한 가난한 남자가 랍비를 찾아와 집은 너무나 좁은데 아내와 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살려니 너무나 힘들다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청한다. 랍비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키우는 닭과 오리를 집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하고, 그다음으로는 염소를, 마지막으로는 소를 집 안에 들여놓으라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랍비는 남자에게 닭과 오리와 염소와 소를 모두 집 밖으로 다시 꺼내놓으라고 하고, 남자는 비로소 자신의 집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졌다는 그런 우화다


딱히 할 일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 좋은 주말에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순간순간 투덜거리다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우화를 떠올린다. 이제 오늘 오후쯤 지인 분이 차를 가지고 와서 집안에 가득 찬 박스들을 싹 들어내 가면 우리 집은 원래 평수의 한 두 배 정도는 넓어 보이겠지. 이거야말로 이사를 가지 않고도 이사 가는 효과를 얻는 셈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주말 내내, 그리고 오늘까지도 집안에 가득 찬 박스 핑계로 귀찮은 아침 청소도 슬쩍 건너뛰었으니 이것 또한 좋은 일이다.


역시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비록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나 딸깍딸깍 움직이는 일로 먹고살고 있지만 몸을 움직여 일한다는 건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한다. 그 일 같지도 않은 포장 알바 잠깐 하는 동안 온갖 철학적인 생각을 다 하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아마 우리 집에도 랍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알바비 몇 만 원은 보너스고.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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