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Jul 05. 2024

다 같은 글자라지만

-221

유명한 올드팝 중에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있다. 영상 매체가 라디오 스타들을 다 죽인다는 그런 노래다. 텔레비전이 처음 보급되던 시기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두려움을 가졌음직도 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라디오를 죽이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다 비슷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사진이 나왔지만 그림을 죽이지 못했고 이메일이 나왔지만 편지를 죽이지는 못했듯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글'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게 되지 않겠나 하는 성급한 예측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인터넷이 기반이 되면서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다 못해 지인에게 밥 먹었느냐는 안부인사를 건넬 때도 우리는 카톡에 텍스트를 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텍스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사방에 넘쳐나는 텍스트들이 전부 같은 성질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로 읽는 텍스트와 핸드폰을 들고 앉아 액정 너머로 보는 텍스트는 다르다. 같은 핸드폰을 통해 보는 텍스트라도 카톡의 메시지창과 이메일의 내용과 포털 사이트에서 읽는 뉴스의 텍스트는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중의 최고는 그야말로 텍스트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종이책을 읽을 때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며칠 전부터 책 한 권을 읽고 있다. 명색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고 날마다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고 있으며 또 생업상 일정량 이상의 글을 읽어야 하니 그깟 책 한 권쯤이야 껌이지, 하고 내심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일이 좀 아닌 것 같다. 책상 앞에 들고 앉아 읽는 책 속의 텍스트는 그 무게가 모니터나 핸드폰 속에 존재하는 텍스트들과 다르다. 그것은 엄연히 실체가 있고 무게가 있으며 그 존재감이 있다. 그래서 한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읽을 수 있는 모니터 속의 텍스트처럼 대충대충, 적당히 여기저기를 건너뛰어가며 읽어 내려가는 식의 '요령'을 허용하지 않는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종이 위에 또렷한 글씨로 인쇄된 글자들은 모니터나 핸드폰 속의 많은 텍스트들과는 달라서 전원을 끈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텍스트에는 필자뿐만 아니라 이 책을 만들고 꾸미고 판매한 모든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가 있으며, 그러니 읽는 너 또한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라고 책은 말없이 게을러진 나를 꾸짖는다.


그래서일까, 그리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닌 것 같은데도 순식간에 후루룩 읽어내지를 못하고 몸이 아픈 사람이 유동식을 조금씩 넘기는 것 모양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이다. 아니라고 생각해도 나의 뇌 또한 이 시대의 가벼운 텍스트들에 너무 적응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부터라도 하루에 펜글씨를 일정 시간 이상 쓰듯 하루에 몇 장 씩이라도 종이책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내가 매일매일 쓰고 있는 이 신변잡기에 가까운 텍스트들은 읽는 분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하는 조금 무거운 생각도 같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겁해서, 백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