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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07. 2024

사탕 하나 집어먹듯이

-223

그를 떠나보내고 난 직후의 일이다. 절간같이 가라앉은 집안의 고요함은 견디기 어렵고, 마땅히 틀어놓을 만한 채널을 찾는 건 더 어려웠다. 웃고 떠드는 방송은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싫었고 슬프고 처지는 방송은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래서 그 무렵 신세를 단단히 진 프로그램 중에 모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던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나와서 자신이 추천하는 책 한 권을 줄거리와 함께 소개하는 30분 남짓한 짧은 프로그램이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던 그 당시의 변덕스러운 마음에도 그 프로그램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잘 와닿았고 그중 몇 권은 실제로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요즘 읽고 있는 「교양독서」라는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때 신세를 진 그 프로그램을 생각나게 한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글도 쓰시는 필자가 본인의 인생의 고비마다 만났던 좋은 책들을 심리/건강/가족/여성이라는 네 가지의 주제로 묶어 소개하는 그런 책이다.


일단 목차를 주루룩 훑어보며 내가 혹시 읽어본 책이 있는지를 찾아봤다. 세 권을 발견했다. 「빨간 머리 앤」,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가 필자와 나의 읽은 책 리스트에 나란히 올라 있었다. 세 권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이고 내가 좋게 본 책을 같이 좋게 봤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뭔가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필자가 쓴 책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확연히 집중력이 떨어져 한꺼번에 긴 분량의 종이책을 읽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배려인지 책 한 권을 소개하는 꼭지가 길어야 열 페이지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아서 책 한 권 분량의 소개글을 읽고 잠깐 한숨을 돌리기에도 꼭 알맞았다.


필자는 경상도 출신의 80년대생 여성이라고 한다. 경상도 출신 70년대생 여성인 나와도 약간의 공통분모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정작 소개하려는 책의 내용보다도 삶을 대하는 필자의 태도와 자세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맞지, 정말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중에서도 한 장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먼 산을 바라봐야 했던 챕터는 「오늘의 리듬」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글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었다. 글을 쓰고, 쓰다가 좌절하고, 이까짓 글 따위 써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래서 토라지듯 글에서 도피하고, 그러나 다시 뭔가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글로 끌려가는 그 환장할 사이클을 담담하게 써놓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많이 웃었고 많이 찡해지기도 했다. 사람 사는 모양은 대개 비슷하다더니 결국 글 쓰는 사람들의 사는 모양도 대개 비슷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쩜 이렇게 내가 내 글이 밉고 꼴 보기 싫어서 눈을 흘기고 치를 떨던 과정을 일면식도 없는 분이 똑같이 겪고 계실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 챕터를 읽고 난 후로는 아 이 필자 믿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쯤 간을 보던 자세를 다 내려놓고 친한 친구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줄줄 따라갔다. 식사를 마치고 입가심으로 사탕 하나 집어먹는 그런 기분으로.


스스로 그리 평탄하게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글의 필자 또한 꽤 험한 생의 모퉁이를 돌아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몇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새삼 내가 보는 남의 인생은 하이라이트라 그 사람이 가장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빛나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보게 되기 마련이며 세상에 아픔도 근심도 없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세 번째 파트인 '가족' 부분에서는 단지 떨어진 집중력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이 조금 버겁게 느껴져서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하는 부분들도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에게 느낄 수밖에 없는 자괴감과 힘겨움을 다룬 부분에서는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겪어보지 못했으나 그냥 생각만 해봐도 그럴 것 같은 일들을 그래도 무사히 겪어낸 필자에게 진심으로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고 싶어졌다.


독서가 인생의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조그만 힌트 정도는 되어준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봤을 때 정말로 그랬던 것 같다. 조금 따라쟁이 같지만 여력이 된다면 나 또한 내 인생의 모서리를 돌아갈 때마다 읽었던 책들에 대해 주절거려 보는 카테고리라도 하나 장만해 볼까 하는 욕심이 들기도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본인이 읽은 책들을 이렇게 솜씨 좋게 잘 꿰어서 보기 좋은 보배로 만들어서 내놓을 수 있는 것 또한 대단한 재주가 아닐까 싶다. 이 분 브런치에 글도 쓰시는 모양인데 어느 브런치인지 슬쩍 염탐이나 하러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 많이 읽고 입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 어디서나 반가운 일이기에.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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