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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08. 2024

찬스를 다 썼으니

-224

결국 7월까지 버티지 못하고 며칠 일찍 개시한 것에 비해 에어컨을 그리 많이는 켜고 있지 않다. 6월 말의 숨 막힐 듯한 더위에 비하면 요 근래 얼마간은 내리는 비 탓인지 뭔지 몰라도 그럭저럭 살만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트는 정도로 버텨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어제 아침에도 무거운 몸을 끌고 꾸역꾸역 일어나 아침 청소와 홈트까지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냉동실에서 꺼내온 물티슈로 목과 얼굴을 닦고 그 찬 물기가 남아있는 위에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면 그야말로 잠시나마 인생사 모든 시름을 잊는 순간이 될 참이었다. 그랬는데, 선풍기가 켜자지 않았다. 정확히는 램프에 불은 틀어오는데 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코드를 한 번 뺐다가 꽂아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분명 지난밤까지도 잘만 틀어놓고 잤는데 이건 또 왜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 성을 가시나 살짝 짜증이 났다.


간만에 웬일로 좀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서, 일단 회전을 시켜보았다. 회전까지는 무사히 잘 되는 것을 보니 전원이 안 들어오는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날개가 돌아가는 부분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덮어놓고 인터넷에 검색부터 했다. 대번에 나오는 말이 날개와 모터가 접합되는 부분의 윤활제가 말라서 그런 거라고, 3천 원 정도에 구비할 수 있으니 하나 사다 놓고 뿌리면 된다는 글들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게 없다는 게 문제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선풍기 커버를 뜯기나 해야 할 것 같아서 드라이버를 들고 앉아 나사를 풀고 커버를 뜯어 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사태가 벌어진 것을 발견했다. 6월 말의 그 갑작스레 더워진 날씨에 새벽 한 시도 넘은 시간에 부랴부랴 선풍기를 꺼내 조립하느라고 뭐가 꽉 맞게 조여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뒷커버를 선풍기 본체에 조립하는 부분이 턱없이 헐거워져 있었고 그에 따라 뒷커버가  딱 고정이 되지 못하고 느슨해져 제 위치에서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문제였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일단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뜯은 것이니 선풍기의 커버와 날개 등을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았다. 꺼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커멓게 먼지가 묻어 나왔다. 그렇게 닦아낸 뒷커버를 제자리에 딱 맞게 놓고 고정한 후 날개를 끼웠다. 앞커버까지를 끼우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코드를 꽂고 살짝 선풍기를 켜 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앞커버까지를 마저 끼웠다.


그가 있을 땐 이런 일은 내가 알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냥 커다랗게 부르기만 하면 그가 뭐든 알아서 다 했으니까. 그랬던 시절은 이제 끝나버렸고, 이젠 하다 못해 선풍기가 갑자기 돌아가지 않는 일이 벌어져도, 그게 윤활제가 말라서 그런 것인지 커버 조립을 잘못해서 그런 건지를 알아보고 그에 맞는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은 전부 내 몫이 되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미 내가 쓸 수 있는 '찬스'를 다 써버렸으니까. 이젠 뭐든지 다 내가 알아서, 나 혼자 해나갈 수밖에.


그래도 한 번 닦아내서 그런지 선풍기 바람이 한결 시원해지긴 했다. 선풍기를 그렇게나 틀고 살 거면 좀 닦아가며 쓰라는 나름의 잔소리였나 싶기도 하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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