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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부산이다. 그리고 부산의 시화(市花)는 동백이다. 동백의 가장 특이한 점은 역시나 남들 다 피는 봄여름이 아닌 겨울에 핀다는 점이겠다. 동백의 개화 시기는 12월에서 1월로, 한참 추워서 남들은 꽃은 고사하고 잎조차 건사하기 어려워서 다 떨구는 시기에 여보란 듯이, 그 새빨갛고 예쁜 꽃을 피운다.
또 슬금슬금 다음 꽃을 사야 할 시기가 되었다. 이제 슬슬 꽃 한 다발 사는 데도 타이밍을 잘 재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열려 있는 상품이 없으면 집 근처 꽃가게에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지난겨울 열릴 때마다 사다 놓고 내내 감탄하면서 봤던 겹백합 판매가 열린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한 대에 서너 송이씩 커다란 꽃송이가 달린 겹백합은 꽃병에 꽂아두면 그야말로 시선강탈이다. 간만에 또 화려한 겹백합을 좀 보겠구나 싶어 즐거워졌다. 흰색을 살까 핑크를 살까. 흰 백합은 이번 유찰꽃 상품에 한 송이 섞여 있었으니 역시 핑크를 주문할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가만있자. 백합도 겨울에 피는 꽃인가? 그런 의문이 갑작스레 들었다.
이 겹백합을 처음 샀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도 날씨가 굉장히 추워서 박스 속에 들어있던 백합들이 덜 피어서가 아니라 추워서 시퍼렇게 질린 듯이 보였었다. 이 판매자님의 겹백합은 언제나 겨울 한참 추울 때에만 판매가 열렸던 것도 기억났다. 백합도 동백처럼 겨울에 피는 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거 참, 추울 때 피는 꽃으로는 딱히 보이지 않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렇지는 않았다. 백합은 본래 따뜻한 시기에만 자라서 꽃이 피는 식물이고, 10월쯤에 구근을 심어 그때부터는 월동에 들어가야 봄쯤에 싹이 난다고 하는 아주 표준적인 생육 주기를 가진 식물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이 판매자님은 따뜻할 때는 다른 꽃을 키우고 겨울쯤에 온실 같은 시설에서 따로 백합을 키워서 출하하시는 모양이다. 그럼직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 꽃집 사장님의 말로는 꽃집의 대목이라 해봐야 2월의 졸업식 시즌과 5월의 어버이날 정도가 고작이라고 한다. 그나마 5월의 어버이날에는 주로 카네이션이 많이 팔리니 다양한 꽃의 수요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졸업식 시즌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착착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컨대 이번에 오는 겹백합은 전적으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한참 겨울잠이나 자고 있어야 할 이 시기에 힘들게 자라 꽃까지 피워낸 대견한 녀석들이라는 말이겠다. 꽂아둘 꽃병을 미리 열탕소독해 두었다가 택배가 오면 재빨리 가져와서 얼른 꽂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들어 부쩍, 고작 전기장판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서 10분 이상을 꾸물거리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래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