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팔방미인이라고 할 만큼 이것저것 다 두루 잘하는 사람이었다. 소위 살림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야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거니와 글씨도 명색 여자인 나보다 훨씬 깔끔하고 예쁘게 잘 썼고 노래도 잘 불렀다. 운전은 내가 아예 하질 않으니 비교가 불가하지만 내가 운전을 할 줄 알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그보다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되는 것은 글 쓰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몇 가지, 다른 건 다 잘하는 사람이 왜 이걸 못하나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뜨거운 아메리카노 마시기'였다. 좀 더 정확히는, 바깥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 와서 마시는 것에 몹시 겁을 냈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씌우는 일회용 뚜껑이 문제였다. 그는 이 뚜껑을 몹시 겁냈다. 이런 뚜껑들은 대개가 불투명한 재질의 얇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컵을 기울였을 때 어느 만큼 음료가 기울여지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서 잘못 마시면 첫 입에 입천장이 홀랑 데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또 그 이유가 다는 아닌 모양이었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투명한 재질로 된 플라스틱 뚜껑을 씌워주는 카페도 있는데 이런 뚜껑도 그는 퍽 마시기를 힘들어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그는 아마도 이 뚜껑이 덜 닫히거나 확 열려서 이 뜨거운 커피가 왈칵 쏟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지만 그런 이유라면 겁이 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 마실 때면 언제나 음료를 준비해 주는 직원에게 한 잔은 뚜껑 씌우지 말고 달라는 말을 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뚜껑을 씌우지 않은 아메리카노는 그도 별문제 없이 잘 마시곤 했다. 그렇게 마시는 그의 커피는 언제나 뚜껑을 씌운 채 마시는 내 커피보다 빨리 식었고, 그러면 나는 아직 온기가 많이 남아있는 내 커피와 그의 커피를 바꿔 주곤 했다. 정말로 뜨거운 커피가 쏟아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맞았던 건지, 그렇게 적당히 식은 커피는 그도 뚜껑을 씌운 채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곧잘 마시곤 했다.
며칠 전 테이크아웃 커피 쿠폰이 하나 생겨서, 외근을 나간 김에 바꿔 먹기로 했다. 쿠폰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쿠폰이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 얼죽아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뜨거운 커피로 받아 왔다. 찬바람에 곱아든 손을 종이컵 위로 베어 나온 온기에 녹이며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 있자니 불쑥 뜨거운 아메리카노 뚜껑에 유독 애를 먹던 그 사람 생각이 났다. 거기 가서도 애처럼, 뚜껑 무서워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못 마시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쯤에는 나름의 요령을 좀 찾았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