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한 때 야구를 꽤 열심히 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고향은 부산이고, 부산 연고 야구팀은 대통령 탄핵이 세 번이나 되는 동안 한 번도 우승 못한 걸로 유명한 모 팀이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야구를 보던 그 무렵의 일이다. 아마 시범경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SM에서 조만간 데뷔할 걸그룸이라는 소녀들이 우르르 나와 시구와 시타를 하고, 클리닝타임에 공연 비슷한 것도 하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이런 말을 하면 욕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그녀들은 지금 같은 '여신들'이 아니었고 그래서 어딘가 좀 촌티도 나고 어설프기도 하고 그랬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한 음악방송에서 들은 노래가 그때 그 노래여서 아 그때 걔들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래가 좋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시대는 그때 이후로 내는 곡마다 히트를 치며 승승장구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어떤 노래도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게 유명 아이돌의 데뷔곡 겸 대표곡 정도로 박제되나 싶던 그 노래는, 그러나 언젠가부터 시위현장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조금 각을 잡으면 '바위처럼'이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다소 격하고 무거운 노래들을 대신해서, 너와 나는 서로 사랑하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다소 말랑말랑하고 감상적이지만 그래서 더 가슴을 울리는 이 노래는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지키는 노래가 되어갔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는 7일 첫 표결 때 탄핵이 통과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장갑차까지 끌고 내려와 국회 유리창을 깨고 진입을 시도하고, 또 그걸 그 야밤에 지켜본 눈이 몇 개인데 저게 탄핵이 안 되면 도대체 뭐가 탄핵이 되는 거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날 투표함을 한 번 열어보지도 못하고 투표 자체가 불성립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야말로 '속에 열불이 터져서' 밤을 꼬박 새웠다. 시시각각 환율은 오르고 주가는 요동쳤다. 그리고 그런 거창한 지표까지 가지 않아도, 혹시나 오늘 밤에 또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닌가 괜히 뉴스를 틀어놓는 나날이 늘어갔다. 주변 분들의 반응도 대개 비슷했다. 그런 10여 일이 지나갔다.
개표가 끝나고 탄핵한 가결을 선포하는 국회의장의 목소리 뒤로 의사당 바깥에서 들려오던 '다시 만난 세계'가 겹쳐서 깔리던 장면은, 그걸 어떤 영화가 재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순간 팔뚝으로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벌써 8년 전이 되어버린 그 촛불시위의 장면들이 주루룩 눈앞을 스쳐갔다. 아직 우리나라가 망할 때는 안 됐나 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은 참, 가끔은 짜증 나고 가끔은 정말 별로고 가끔은 정이 뚝뚝 떨어지는 나라다. 그러나 이럴 때 보면 또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나라인 것도 같다. 오늘 밤에는 오래전 그 시범경기에 시구를 하러 나왔던 '소녀시대'를 생각하면서 '다시 만난 세계'나 밤새 들어야겠다. 결국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을 끝낼 수 있는 건 우리의 사랑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