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오펜하이머 : 양자역학에 대하여
완전히 밀폐된, 불투명한 상자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스가 담긴 병이 들어있다. 청산가스가 담긴 병 위에는 망치가 있으며, 망치는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다. 계수기에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를 내려치는 장치가 작동하여 병이 깨지고, 고양이는 청산가스에 중독되어 죽고 만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는 1시간에 50%의 확률로 핵이 붕괴하여 알파선을 방출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있다.
1시간 뒤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살아있는 상태인가, 혹은 죽어있는 상태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사고실험이다. 코펜하겐에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아인슈타인 등 물리학자들이 모여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양자역학 반대파인 슈뢰딩거가 이를 비판하기 위해 제안한 예시다.
상자를 열어 관측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어있는 고양이가 상자 안에서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 즉 상반된 결과가 중첩되어 있다는 양자역학이 궤변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사고실험은 ‘관측을 해야만 비로소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유명해져버렸다.
양자역학의 바보 같음을 비꼬기 위해 주장한 것이었지만, 양자역학 입장에선 구구절절 옳은 말일뿐이었고, 오히려 다른 예시들보다 이해하기도 쉬워서 이 사고실험을 오히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고양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빛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양자역학은 언제나 관측 이전의 상태를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양자역학과는 달리, 언제나 누군가의 상태를 정하고 싶어 한다. 이 영화 <오펜하이머> 속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오펜하이머가 유능한 학자인지 아닌지,
그와 그를 둘러싼 지인들이 공산주의자였는지 아닌지,
맨해튼 프로젝트에 그가 진심으로 찬성하는지 아닌지,
원자폭탄을 온전히 과학이나 기술로만 바라보는지 아닌지,
그 폭탄이 터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가 트리니티의 리더인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악마인지,
소련의 스파이인지 진정한 애국자인지,
아내 키티를 사랑하는지 진을 사랑하는지까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과 같이 오펜하이머는 우라늄 상자를 완성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이 완성한 그 상자에 갇힌다.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하나로 규정하지 않으려하지만, 세상은 오펜하이머라는 고양이를 어떻게든 관측하여 그 상태를 정하려 시도한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는 궤변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전반적인 과정들을 통해 오펜하이머가 어떤 선택들로 인해 본인이 만든 상자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어떠한’ 관측들을 통해 그의 상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를 오랫동안 관측했던 사람들과,
순간들을 관측했던 사람들.
그의 따스함을 관측했던 사람들과,
차갑고 냉철함을 관측했던 사람들.
직접적인 말과 행동들을 관측했던 사람들과,
기록과 커리어만을 관측했던 사람들.
누군가의 관측에선 죽어있고, 누군가에 관측에선 살아있기도 한 오펜하이머라는 고양이에 대해 다양한 관측들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오펜하이머가 어떤 상태인지 결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아무래도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다루다 보니 결국 사람들은 오펜하이머를 상자 안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결정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만 나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자본주의자이지만 때로는 사회주의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오만하지만 때로는 겸손하며,
때로는 착하지만 때로는 지독하게 사악하기도 하며,
때로는 풀잎처럼 나약하지만 때로는 아다만티움처럼 강인한 것.
관측 시간에 따라 그 상태가 확률적으로 달라지는 것. 그것이 이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양자역학 아니던가.
그리고 오펜하이머도, 우리들도 단지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양자가 아닐까. 언제나 매번 상자 속 고양이를 관측하여 그 생사 여부를 정할 필요는 없는 듯 싶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놀란의 SF 영화들과는 다른 결의 명작이기에, <다크나이크 라이즈>나 <덩케르크>까지도 재밌게 본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