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행복한 2023년, 덕분에 행복할 2024년
원래 새해 인사 같은 건 안 해왔다.
오히려 극혐하는 편에 가까웠다.
해가 바뀌는 게 뭐라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어차피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니까.
괜히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신년 인사 제로 라이프를 실천해왔다.
그러나 힘들었던 2023년, 그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에 가슴 운동을 하다 보니 어딘가 가슴이 달아올랐나 보다.
문득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무탈히 보낼 수 있던 원동력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새해 인사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2023년에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차라도 한 잔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나는 고민과 힘듦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그저 무던한 척, 그저 유쾌한 척을 하며 속은 썩어 문드러졌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과 친구, 스승 그 누구에게도 그런 어둠은 드러내지 못했다.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누군가의 반짝거리는 제자,
누군가의 무던하고 유쾌한 친구로 남고 싶었기에.
그저 속으로 어둠을 삼키며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람이 무서웠고, 무던하고 유쾌한 척을 했지만 혼자라도 남게 되면 날 집어삼키는 집채만한 어둠을 꾸역꾸역 삼키며 토악질을 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혼자서 꾸역꾸역 어둠을 이겨내던 시간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시간이 지나 더 무던하고 유쾌한 사람, 말 그대로 웃음으로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해학적인 사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관계를 대하는 방향성을 정한 것 같다.
내면의 어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어둠을 드러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 어둠을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특히 올해는 많은 사람들과 나의 어둠을 나눴던 것 같다.
그들 각자에게 나의 힘듦과 버거움을 드러냈든 드러내지 않았든 그들과의 시간은 내게 각자 다른 ‘재미와 웃음’을 주었고, 그를 통해 마음 어딘가에 있는 무거움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그게 감사했나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31일 8시쯤에야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난 한해 나와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를 담은 짤을 찾는데 이 사진이 가장 먼저 뜨더라. 쌔끈빠끈한 여고생의 큰 절이 적당히 기괴하고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행복한 2023년이었습니다. 덕분에 더 행복할 2024년, 미리 신세 지겠습니다.”로 너무 헤비하지 않은 문구 역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사진 첨부하고 메세지를 복붙하는 단순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10시가 지났더라.
중간 중간 답해준 애송이들에게 그때 그때 답장도 하고 하다보니 조나 힘이 들었다. 메세지를 다 보내고나니 힘이 다 빠져 제야의 종이니 신년 카운트다운이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치도 못하고 스르륵 잠들었다.
눈떠보니 24년 1월 1일 새벽 4시였다.
뒤늦게 일어나 이를 닦았다.
사람 일 모르는 것이라고 올해도 새해 인사를 보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여나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매크로 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