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겹지만 이게 나인걸
어린 시절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행실이 바르고 성실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아이’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원만한 성격으로 좋은 교우관계를 가진 아이’라고 6년 내내 일관되게 쓰여있던 초등학교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대로 나 스스로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과목에서 100점을 받았을 때 기뻤던 아이,
운동회에서 청팀이 지면 슬펐던 아이,
오이 특유의 향을 싫어했고 놀이기구 타는 걸 두려워했던 아이,
그렇지만 예의가 바르고 인사성이 좋아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던 아이,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매번 반장으로 뽑혔던 아이.
나는 이렇게 그저 좋기만 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이 많아 학급에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친구들과 잘 지내고자 노력하기도 하면서도, 때로는 도를 넘는 장난들에 누군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저 방조했던 소년.
담임 선생님의 손발이 되어 학급일에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교묘하게 선생님들의 호감을 무기 삼아 일탈을 하던 위선적인 소년.
언제나 대가리 꽃밭 상태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척, 여느 모범생과는 달리 수행평가들과 시험들에 초연한 척, 어려움이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쿨가이긴 척했으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시험마다 덜덜 떨며 엄마에게 전화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소년.
사춘기의 나는 알고 보니 그런 위선자였다.
그래서 그런 나를 역겨워하던 시기도 있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면서도 무던한 척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고, 나 자신을 좋기만 한 사람인 척 포장했던 내 포장지가 역겨웠다.
실제로 나는 심연에 빠져 있는데 유쾌한 척 유머를 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고, 사람들을 만나는 걸 너무나 두려워했지만 괜찮은 척하던 내가 역겨웠다.
그리고 그 모든 시절을 지나, 비로소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긍정적이고 이상을 꿈꾸는 편이지만 대가리 꽃밭은 아닌 몽상가
가지고 있는 삶의 속도가 다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각자의 꿈을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지 않는 사람,
그러나 때로는 선을 넘는 장난을 쳐서 빠르게 사과하고 여전히 사회화를 학습하고 있는 소시오패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진솔하게 말하는 편이지만 그가 가진 눈부신 장점들을 담백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실제로 많은 것이 그저 괜찮은 무던 인간이지만, 대인배 포지션인 나의 모습을 즐기는 변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은 해줄 수 없고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좋지만,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논리 정연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렇게 나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더라도 대체로 괜찮은 사람.
때로는 그런 사람이며, 때로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노력의 과정에서의 우당탕탕 쿠당탕탕 다채로운 나의 모습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부정적 감정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시간을 조금 가지고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복합적 감정을 유발하는 생애사건 안에는 언제나 한 편의 영화 못지않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나의 모든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둘러 판단하고 단정 짓기보다는 영화관에 앉아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된 것처럼 내 마음 상태를 바라보고 감정에 응답하되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를 좋아하긴 좋아하나,
여전히 나는 존나 부족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될 행동으로 이불킥을 하며,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부담으로 느낀다.
여전히 사랑 앞에 작아지고 오판하며,
여전히 나는 관계들이 어렵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인정하기 싫더라도 그게 전부 내 이야기였고,
여전히 부족하고 역겹지만 이게 그냥 나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