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time Reviewer Oct 26. 2024

<노르웨이의 숲> 리뷰

지독하게 현실적인 상실 극복기


처음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던 건 15살 때였다.


그 시절의 내게 노르웨이의 숲은 합법적 야설이었다. 내 생각엔 그저 야설일 뿐인 이 책을 읽고 있기만 해도 기특하게 바라보던 부모님, 교양 있는 학생으로 생각하던 어른들. 합법적으로 야설을 보면서도 교양 있고 조숙한 이미지를 줄 수 있던 씹가성비 독서였던 것이다. 심지어 재미도 있었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갔을 뿐 진정 이 책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미도리를 제정신이 아닌 인물로 기억하고 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누군가 작중 미도리와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작중 미도리처럼 생뚱하면서도 순수한 욕망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영정사진 앞에서‘ 어쩌고 하며 얘기하는 그 사람을 보며 나는 그 사람을 ‘미도리병’에 걸린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고 소름 돋아하며 밀어냈다.

그땐 그랬다.



스물에 뒤적거렸던 이후 제대로 다시 읽게 된 것이 최근.

어느덧 나는 서른이 되어 15년 만에 노르웨이의 숲에 다시 가보았다. 확실히 열다섯 겨털도 안 난 뽀송이 시절과는 달랐다. 뭔가 이제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달까.


어렸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음담패설하던 미도리가,

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서 발가벗고 요가 자세를 취하며 여기저기 보여줬다는 미도리가,

본인이 딸기 쇼트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사온 케이크를 집어던지는 것이 사랑이라 말하는 미도리가,

그저 미친년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른이 되어 다시 보니 작품에서 작가가 가장 긍정하고 있는 인물이 미도리라 느껴졌다.


친언니와 남자친구가 자살한 나오코,

친한 친구와 여자친구가 자살한 와타나베,

피아니스트라는 꿈과 가족을 잃어버린 레이코 씨,

자신을 힘껏 사랑해 주던 하쓰미를 잃고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들은 나가사와,

엄마와 아빠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그 과정에서 청춘을 잃어버린 미도리.

등장인물의 거의 대부분이 상실을 겪었다.


그러니 상실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 상실의 결과를 인정하며, 상실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사람이 미도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굉장히 키치하고 통통튀며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아버지의 병수발할 때나 사랑하는 와타나베가 방황할 때 대하는 태도 등을 보면 필요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

오랜 병수발로 사랑받는 어린 시절과 젊음을 상실했지만 상실을 인정하고 이내 일어나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

기본적으로 재치가 있으면서 야한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자,

웃음으로 눈물 닦는 것의 미덕을 아는 사람.


서른에 다시 만난 미도리는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면 저울질을 시작한다.

본인이 처한 상황을, 자아의 무게를, 외부 사회의 무게를 버틸 자신이 없어지면 본인이 쥐고 있는 것 중 제일 놓기 쉬운 순서로, 또 자기 마음이 다치지 않는 순서로 무언가를 포기한다.

심지어 작중 대다수의 인물들처럼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리기까지 한다.


따라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동반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누군가를 진정으로 잃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상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이를 앗아가고, 소중했던 꿈을 잊게 만들며, 행복했던 날을 옅어지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아가, 내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미도리와 같이 잃어버린 것들에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면, 자신을 가엾어하지 않기로 한다면, 고통을 뒤로하고 행복하기로 한다면 말이다.

너무도 소중해 평생 옆에 두고 싶은 것들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떠나갈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실은 극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 듯싶다.




내가 서른에 다시 가본 노르웨이의 숲은 그저 감성적 야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하게 현실적인 상실 극복기였다.

상실의 아픔을 지나고 있을 당신에게,

책장에 이 책을 오래 방치했을 당신에게,

그리고 언젠가 상실을 겪을 당신들에게,

노르웨이의 숲에 다시 가볼 것을 추천한다.

작가의 이전글 샤로수길 '아궁이빙수'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